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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의 사람들은 이 낮은 말의 위력 앞에 모두 말 없이 물러났다. 그러나 2천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는 스스로 죄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돌을 던지리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 땅이 너무나 죄로 얼룩져 있어서 돌을 더욱 세게 던지는 것만이 면죄부인 양, 조금이라도 더 뻔뻔하게. 어떻게 우리는 죄의 수 만큼 변명이 있는 ‘죄 없는 자들의 땅’에서 용서받고 용서할 수 있을까.
고두의 테마는 변명-사과-용서이다. 윤리교사인 화자의 아버지는 승강장에서 당당히 담배를 태우다 당신을 단속하려는 사람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국가유공자증을 내민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변명의 증서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그는 변명만이 존재하는 아버지의 무지를 탓하며 학생들에게 형식을 갖춘 사과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는 또한 불량한 학생에게 아무런 내용이 없지만 형식을 갖춘 사과를 하며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느끼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사과에 있어서 형식이 진정성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작품의 실제 구조에 비추어 봤을 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건 그 반대인 듯하다.
변명의 부재는 사과를 담보하지만 사과의 형식은 그 진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 이러한 내용은 반복해서 인물들을 통해 대조되는데 특히 변명-사과의 모티프는 아버지-나에서 연주-모범생, 그리고 연주-나로 전이되고 또한 그 위치를 바꾸어 변주된다. 그리고 변주는 인물간의 관계뿐만이 아닌 인물 자체에서도 드러나는데 ‘나’는 변명-사과의 구조 안에서 역행적인 구도를 보여주고 연주는 순행적인 구도를 보여준다.
그녀가 맞은 첫번째 뺨-가게에서 진상손님에게 맞은 뺨에는 사과가 없었다. 그녀가 맞은 두번째 뺨-밤거리에서 학생지도 선생에게 맞은 뺨에는 형식은 있었지만 내용이(진정성을 담보하지는 않지만 진정성에 의해 담보되는)없었다. 그녀가 맞은 세번째 뺨-병원에서 모범생의 부모에게 맞은 뺨에는 형식은 있되 진정성은 없었다.
그녀는 사과가 없는 인물에서 가장 완벽한 형식의 사과를 갖춘 인물로 변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 용서는 없었다. 그녀는 뜨거워진 뺨의 열기로 ‘나’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성과 용서는 어디에 있는가? 사실 고두는 변명과 형식의 사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진정성과 용서를 슬그머니 숨기고 있다. 용서는 단 한번, 연주 만이 보여주는데 ‘나’가 평판을 위해 침묵하고 있던 사실에 대해 사과했을 때이다. 하지만 그녀가 부른 배를 이끌고 무릎 꿇으며 가장 완벽한 사과를 보여주었을 때 ‘나’는 연주와 달리 그녀의 사과에 대해 용서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용서는 사라지고 사과로 다시 변명으로 회귀한다.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신과 연주의 자식에게 하는 진정성도, 형식조차도 파괴된 ‘나’의 변명만이 남게 된 것이다.
고두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기에 끊임없이 반성해야 하지.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으면 그냥 생긴대로 살게 된다.”라는 인간상을 변명-사과-용서, 그리고 회귀로서 작품 전체에 걸쳐 보여준다. 그리고 용서에 대해서 나-연주의 구도는“정치인을 혐오하고 가정폭력범과 강간범을 혐오하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혐오하는 게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회”속 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를 용서하고 가장 완벽한 사과를 보여준 연주와 그녀를 용서하지 못한 채 다시 변명으로 회귀하는 ‘나’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상대의 죄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방법이고 그 변명이 상대가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되는, 죄의 수 만큼 변명이 있는 ‘죄 없는 자들의 천국’에서 우리의 죄를 직시할 방법은 돌을 내려놓고 변명을 내려놓는 것 뿐 아닐까.
고두의 테마는 변명-사과-용서이다. 윤리교사인 화자의 아버지는 승강장에서 당당히 담배를 태우다 당신을 단속하려는 사람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국가유공자증을 내민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변명의 증서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그는 변명만이 존재하는 아버지의 무지를 탓하며 학생들에게 형식을 갖춘 사과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는 또한 불량한 학생에게 아무런 내용이 없지만 형식을 갖춘 사과를 하며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느끼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사과에 있어서 형식이 진정성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작품의 실제 구조에 비추어 봤을 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건 그 반대인 듯하다.
변명의 부재는 사과를 담보하지만 사과의 형식은 그 진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 이러한 내용은 반복해서 인물들을 통해 대조되는데 특히 변명-사과의 모티프는 아버지-나에서 연주-모범생, 그리고 연주-나로 전이되고 또한 그 위치를 바꾸어 변주된다. 그리고 변주는 인물간의 관계뿐만이 아닌 인물 자체에서도 드러나는데 ‘나’는 변명-사과의 구조 안에서 역행적인 구도를 보여주고 연주는 순행적인 구도를 보여준다.
그녀가 맞은 첫번째 뺨-가게에서 진상손님에게 맞은 뺨에는 사과가 없었다. 그녀가 맞은 두번째 뺨-밤거리에서 학생지도 선생에게 맞은 뺨에는 형식은 있었지만 내용이(진정성을 담보하지는 않지만 진정성에 의해 담보되는)없었다. 그녀가 맞은 세번째 뺨-병원에서 모범생의 부모에게 맞은 뺨에는 형식은 있되 진정성은 없었다.
그녀는 사과가 없는 인물에서 가장 완벽한 형식의 사과를 갖춘 인물로 변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 용서는 없었다. 그녀는 뜨거워진 뺨의 열기로 ‘나’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성과 용서는 어디에 있는가? 사실 고두는 변명과 형식의 사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진정성과 용서를 슬그머니 숨기고 있다. 용서는 단 한번, 연주 만이 보여주는데 ‘나’가 평판을 위해 침묵하고 있던 사실에 대해 사과했을 때이다. 하지만 그녀가 부른 배를 이끌고 무릎 꿇으며 가장 완벽한 사과를 보여주었을 때 ‘나’는 연주와 달리 그녀의 사과에 대해 용서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용서는 사라지고 사과로 다시 변명으로 회귀한다.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신과 연주의 자식에게 하는 진정성도, 형식조차도 파괴된 ‘나’의 변명만이 남게 된 것이다.
고두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기에 끊임없이 반성해야 하지.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으면 그냥 생긴대로 살게 된다.”라는 인간상을 변명-사과-용서, 그리고 회귀로서 작품 전체에 걸쳐 보여준다. 그리고 용서에 대해서 나-연주의 구도는“정치인을 혐오하고 가정폭력범과 강간범을 혐오하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혐오하는 게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회”속 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를 용서하고 가장 완벽한 사과를 보여준 연주와 그녀를 용서하지 못한 채 다시 변명으로 회귀하는 ‘나’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상대의 죄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방법이고 그 변명이 상대가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되는, 죄의 수 만큼 변명이 있는 ‘죄 없는 자들의 천국’에서 우리의 죄를 직시할 방법은 돌을 내려놓고 변명을 내려놓는 것 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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