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24b0d121e09c28a8699fe8b115ef046c64f12a4b9d



글을 읽으면서 늘 다른 글과 비교하며 생각하는 습관이 그리 좋은 습관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생각해보자면, 해롤드 핀터 생각이 많이 났다. 책에 수록된 희곡, <노부인의 방문>은 각각 <생일파티>를 떠올리게 만든다.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천천히 파고드는 외부 세계의 거대한 폭력이나, 눈치 채기도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그 권력에 의한 사역과 배신을 보면서 확실히, 이런 구도 자체가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재차 하고 있었다. 사실 고대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테다. 주체가 세속적인 권력이 아닐 뿐.


<노부인의 방문>에서 노부인은 일종의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며, 극 전체에서 사람들을 천천히 압박하는 돈의 권력의 사역자로 작용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노부인이 요구하는 정의의 집행에 있어, 이 집행에서 희생되어야 할 일의 위치다. 일은 단지 집단적 폭력의 가해자이자 복수의 피해자로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기실, 노부인이 말 그대로 마을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일의 역할이 보인다. 일은 그녀의 세례 속에서 고통받다가, 점차, 완성된다. 무엇으로? 이 권력의 축제를 위한 희생양으로. 노부인 클레어는 일에게 상당한 애착을 보이고, 매번 갈아치우는 남편과는 달리 그의 시신을 따로 가져가 끝까지 함께하고자 한다. 마치 신이 가장 순결하고 값나가는 희생양을 손수 받아가는 것처럼.


그런 점에서 핀터의 <생일파티>와 <노부인의 방문>이 대조적인 점은, 핀터 역시 뒤렌마트처럼 현대의 이 신성한 침입을 그려냈지만, 신성함과 함께하는 숭고함 대신 날것의 폭력을 채워넣었다는 것이리라. 사실 <노부인의 방문>은 상당히 부드럽다. 뒤렌마트 본인이 일종의 희비극을 의도했다고 말했듯, 돈의 세례를 받기 위해 희생되는 일에게는 그래야 할 명분도, 그래야 할 대가도 있다. <생일파티>의 '희생양' 스탠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신적인 체계의 천사로서 다가온 골드버그와 맥켄에게 '세례'를 받고 세속에서 신성의 세계로 끌려갈 뿐.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이 기괴한 잔혹함이 좀 더 맞는다.


<물리학자>에 대해서는 사실 할 말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극적인 아이러니는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고, 너무 노골적인 미국과 소련에 대한 비유가 좀 조악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현대에 읽기에는 좀 과대망상적인 기술공포증에 살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소위 '군산복합체' 운운이 떠오르기도 하고. 핵무기에 대한 이야기를 볼 때면 드는 생각: 개틀링 박사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핵폭탄은 기어이 성공한 폭력의 공포로 인한 평화가 정말 그렇게나 문제인 걸까? 핵폭탄만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과연 미국과 소련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