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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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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민족주의를 들먹이는 것은 약간의 불온함을 자초하는 격이다. 한국을 포함한 수많은 세계의 현대 국가들이 민족주의를 토대로 건설되었음에도, 현대에 와서 이는 이제 폐기되어야 할 사상, 혹은 수많은 분쟁을 낳은 과거의 망령으로까지 취급되기도 한다. 파시즘이라는 쓰기 편한 매도의 용어처럼 온갖 종류의 "인종주의(racism)나 잡동사니를 마구 쓸어담는 '부족주의'(catch-all 'tribalism)"로 쓰이기도 하며.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지금 우리를 한국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고, 젊은이들에게 만연한 냉소적인 태도와 별개로 이런 민족적인 소속감 및 공동체 의식이 실제로 현재도 수많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은 실재한다.


<족류>에서 스미스는 이 실재하는 민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근대 민족주의의 완성 뿐이 아니라 그 이전, 근대적 민족의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준 전근대의 족류 공동체가 어떻게 근대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지를 역사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을 만들기 위한 필요성이 근대에 주어진 것과는 별개로, 이 필요성은 그 민족이 어떤 성격을 띠는지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해주지 못한다는 분명한 지적과 함께. 더욱이, 족류 공동체에서 민족의 방향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물질적인 근본이 아닌 보다 더 정신적인 것, 이를 테면 예전부터 족류와 함께 하고 있던 영토/고토라든가, 생물학적 혈연보다는 보다 더 신화적인 그들의 조상이라든가, 이 족류가 근본적으로 세상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설명이라든가 등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근대의 수많은 사상들은 대체로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일종의 단절을 상정하는 경우가 꽤나 많다는 생각이 든다. 암흑기로만 묘사되는 중세를 현대에 재차 밝히는 과정과 더불어, 민족에 대한 개념 역시 언어와 문학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출현한 '상상된 공동체'에서 벗어나 보다 더 자연스러운 사회적 변화 과정의 일환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닌가. 저자가 책에서 언급하듯, 이런 역사적으로 연속적인 족류 공동체 및 상징체계가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 사하라 이남의 여러 국가에서 민족주의가 실패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흥미롭다. 아마 식자층이 기존에 생각했던 것처럼 수직적으로, 엘리트들이 말 그대로 발명해내면 아래에서는 이를 어느새 그대로 따르고 있는 모델과는 조금 다를 테다. 더군다나, 민족이 엘리트들의 국가적 착취를 위한 발명품에 불과하다는 진보적인 비판과도 거리가 있을 테고.


실제로 각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다소 고리타분한 옛 신화나 상징들을 들고 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족에 속할 대중들에게 민족의 필요성 및 매력을 보이기 위해선 그들에게 맞는 언어와 비유가 필요하다. 식자층에게는 다소 낯설 수도 있고 야만적이라고도 느껴지는 여러 모티브들이 빈민가에서는 꽤나 성행하는 신앙인 경우도 허다하다. 또는, 원래는 꽤나 국소적인 지역의 주민들만의 신화였지만, 그 매력성이 다수 대중들에게 확장될 수 있도록 변형 가능한 경우도 많다. 이를 변형에 실패한 민족주의는 반대에 부딪히며, 대중들을 이미 사로잡고 있는 기존의 질서, 이를 테면 기독교에 패배하곤 한다. 중남미에서 해방신학이 민족주의 운동과 얽히는 데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나 젊은이들 사이에서 팽배한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식의 접근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 있을 테다. 과연 이것이 그리 쉽게 제거될 수 있고, 점차 녹슬고 있는 순전한 발명품에 불과할까? 근본적으로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무언가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것을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되살리지 말아야 할 것으로 다소 상대를 축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논쟁에 있어서는 효과적인 방식이지만, 그것이 현실을 실제로 훌륭히 분석하며 우리에게 올바른 통찰력을 줄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