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가책은 인간을 그의 동물적 과거로부터 억지로 떼어낸 결과이다. 모든 인간은 원초적 본능으로써 섭리에서 오는 자유의지를 가지며, 개인적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과정은 그것이 크든 작든 필연적으로 타인의 권리침해를 동반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외부를 향하여 생성된 공격성은 사회적인 권력에 의하여 규정된 도덕법칙에 의하여 왜곡되고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자신의 내부를 관통한다.ㅡ'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악이다.' 라고 자신을 책망하고 욕하고 채찍질 하는 식. 이런 자기 공격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내면화된 죄의식인 양심의 가책은 마치 인간의 내면에서 울려퍼지는 신의 음성으로 착각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드디어 자신의 본성을 오해하게 된 것이다.
모든 공격에는 공격의 쾌감이 수반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자신의 본능적 공격성 그 자체를 공격하면서도 쾌감을 느낀다. 자신의 본능적 공격성을 잠재웠다는 사실에서, 즉 자기 내면에서 울려퍼지는 신의 음성을 따랐다는 점에 기인하는 쾌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양심의 가책은 도덕성의 징표가 아닌 인간의 자기학대와 자기증오의 표식이며, 양심에 따르는 행위를 함으로써 얻는 쾌감이란 자기학대를 통해 얻는 병적인 쾌감인 것이다.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항해서 정치조직(국가)이 스스로를 지키기위해서 구축해 놓은 저 끔찍한 방벽ㅡ무엇보다도 형벌은 이러한 방벽 중의 하나이지만ㅡ은 야성적이고, 자유롭고, 방랑적인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을 거꾸로 돌려서 인간 자신을 향하게 만들었다. 적대감, 잔인성, 박해와 습격의 쾌감, 변화와 파괴의 쾌감, 이 모든 것이 그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에게로 방향전환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외부의 적과 저항이 없어지고, 도덕의 엄청난 협소함과 규제 속에 강제로 밀쳐 넣어진 인간은 성급하게 자기 자신을 찢고, 책망하고 물어뜯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그를 길들이기 위해 설치한 울의 창살에다 몸을 부딪쳐 상처투성이가 된 이 동물, 황야에의 향수에 지쳐 스스로 모험, 고문대와, 위험한 황야에 몸을 내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궁핍한 동물, 이 바보, 그리움에 지치고 절망해버린 이 죄수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발명자가 된 것이다>*
*도덕의 계보 P145
기독교에서 말하는 양심의 가책을 인간의 선천적 본능으로 오해하게 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축군들의 도덕상 노예반란은 승리를 굳힐 수 있었다. 기독교적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동정, 자비, 친절, 인내, 자기희생, 자기부정 등등의 축군도덕들의 덕목들이 도출될 수 있었다. 병든 양심이야말로 모든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를 위한 전제"가 되었다.
노예들의 축군도덕은 승려들의 지배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노예도덕은 자연적 건강성의 징표인 인간의 공격 본능을 죄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이 죄의식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었고, 강자를 향한 원한 감정을 조성함으로써 강한 자는 악한자이며 약한 자는 선한 자라는 도덕 공식을 만들어낸다. 선한 자인 약한 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강한 자에게 대적할 수 없음으로, 강한 자를 벌로써 다스리는 신적인 허구를 만들어 낸다. 결과적으로 신은 남을 공격하는 자를 영원한 불로써 심판한다는 협박의 효력이 생기기 위한 보편적인 죄의식(양심의 가책)을 창조하는 데, 기독교 승려들은 인간에게 있는 보편적인 공격성을 보편적인 죄로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들은 모든 인간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다. 기독교 승려들의 영토는 죄의식이 있는 모든 곳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끊임없이 인간이 죄인임을 설교한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피안과 무의 다른 이름인 벌하는 신이라는 허구에 의지하여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지배권을 확대 강화해 가고 있다.
모든 공격에는 공격의 쾌감이 수반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자신의 본능적 공격성 그 자체를 공격하면서도 쾌감을 느낀다. 자신의 본능적 공격성을 잠재웠다는 사실에서, 즉 자기 내면에서 울려퍼지는 신의 음성을 따랐다는 점에 기인하는 쾌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양심의 가책은 도덕성의 징표가 아닌 인간의 자기학대와 자기증오의 표식이며, 양심에 따르는 행위를 함으로써 얻는 쾌감이란 자기학대를 통해 얻는 병적인 쾌감인 것이다.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항해서 정치조직(국가)이 스스로를 지키기위해서 구축해 놓은 저 끔찍한 방벽ㅡ무엇보다도 형벌은 이러한 방벽 중의 하나이지만ㅡ은 야성적이고, 자유롭고, 방랑적인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을 거꾸로 돌려서 인간 자신을 향하게 만들었다. 적대감, 잔인성, 박해와 습격의 쾌감, 변화와 파괴의 쾌감, 이 모든 것이 그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에게로 방향전환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외부의 적과 저항이 없어지고, 도덕의 엄청난 협소함과 규제 속에 강제로 밀쳐 넣어진 인간은 성급하게 자기 자신을 찢고, 책망하고 물어뜯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그를 길들이기 위해 설치한 울의 창살에다 몸을 부딪쳐 상처투성이가 된 이 동물, 황야에의 향수에 지쳐 스스로 모험, 고문대와, 위험한 황야에 몸을 내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궁핍한 동물, 이 바보, 그리움에 지치고 절망해버린 이 죄수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발명자가 된 것이다>*
*도덕의 계보 P145
기독교에서 말하는 양심의 가책을 인간의 선천적 본능으로 오해하게 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축군들의 도덕상 노예반란은 승리를 굳힐 수 있었다. 기독교적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동정, 자비, 친절, 인내, 자기희생, 자기부정 등등의 축군도덕들의 덕목들이 도출될 수 있었다. 병든 양심이야말로 모든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를 위한 전제"가 되었다.
노예들의 축군도덕은 승려들의 지배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노예도덕은 자연적 건강성의 징표인 인간의 공격 본능을 죄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이 죄의식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었고, 강자를 향한 원한 감정을 조성함으로써 강한 자는 악한자이며 약한 자는 선한 자라는 도덕 공식을 만들어낸다. 선한 자인 약한 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강한 자에게 대적할 수 없음으로, 강한 자를 벌로써 다스리는 신적인 허구를 만들어 낸다. 결과적으로 신은 남을 공격하는 자를 영원한 불로써 심판한다는 협박의 효력이 생기기 위한 보편적인 죄의식(양심의 가책)을 창조하는 데, 기독교 승려들은 인간에게 있는 보편적인 공격성을 보편적인 죄로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들은 모든 인간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다. 기독교 승려들의 영토는 죄의식이 있는 모든 곳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끊임없이 인간이 죄인임을 설교한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피안과 무의 다른 이름인 벌하는 신이라는 허구에 의지하여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지배권을 확대 강화해 가고 있다.
[퍼] 냄새가 나지만 굳이 첨언하자면 인간의 본성이 뭔지는 누구도 모름.. 니체는 그냥 자기가 익숙한 짐승들의 행태에 대해서 관찰하고 저게 모든 생물의 본능일 것이다라고 확정지은것일 뿐임. 이런 사례의 반례로 자주 쓰이는 꿀벌의 경우는 모든게 집단 유지를 위해 맞춰짐. 집단을 위해 일하고 집단의 존속을 어지럽히는건 과감하게 쳐내고 결정적으로 자기가 집단에 해악이 된다 싶으면 스스로 멀리 날아가서 죽음. 내가보기에 니체는 자기 조울증을 극복해보려 여러가지 해보다가 사상을 만들어서 자신을 괴롭히는 울증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안쓰러운 사람정도임..
ㅍㅌ)모든 생명체는 생존 본능을 가진다. 그것이 생명체의 불변하는 본성이다. 하다못해 도축되어가는 돼지도 생존본능을 가지고 발버둥친다. 자유의지가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을 꿀벌과 같은 보편성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사례 하나만으로 반론을 할 수 없다. 그에 반례로 모든 동물이 살기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존재하며, 이것이 '보편성에 가까운 객관적' 진리다.
또한 꿀벌의 사례와 같은 '보편성에서 벗어난 주관적 예시'는 단순 버그 정도로 반박 가능하다. 꿀벌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꿀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서'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와중에 목적을 까먹고 '집단 유지'라는 과정에 함몰된 채 자신만의 허영속에 빠진 것 뿐이다.
파이팅
그리고 '목적을 잊은' 꿀을 많이 못모은 꿀벌 공동체는, '공동체' 얽매여서 '현실'을 보지 못하고 겨울을 못견뎌 파멸한다.
섭리에도 존재하지 않는 영원을 좇는이들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계몽이 덜된' 종속 들이며, 이들은 '보편성에서 벗어난 주관적인 영역'만을 따질 뿐이다.
진리는 없다고? ㅇㅋ인정한다. 다만 적어도 진리에 가까운건 사랑, 평등과 같은 허무맹랑한 몽상이 아니라, 자유의지다. 이게 팩트
그리하여, 모든 것은 돌고 돌며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영원한 것은 돌고돈다는 자연의 법칙 뿐이다. 니가 주장하는 평등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ㅡ니가 실데로 그것을 주장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과 비스무레한 것ㅡ은 역사적 고찰로 보았을 때 존재하지 않았던 사상이며, 저 '돌고도는 것'에 끼지도 못했다.
오직 '자유의지를 위한 투쟁'의 굴레일 뿐이다. 자유의지가 섭리다.
오
이거 무슨책임? 안티크라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