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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서학, 천주교의 관계는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거리였다. 교회사를 전공한 원재연은 정약용과 천주교, 서학의 관계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사를 정리하였다. 우선 주목할 연구는 정순우가 1993년에 발표한 「다산연구의 재논점과 쟁점」이다. 정순우는 이 논문에서 기존 다산학 연구의 경향을 다산학과 성리학의 관계와 다산학과 서학의 관계로 대별한다. 그리고 유초하와 한형조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으며, 정약용을 철학없는 철학자로 평가절하하는 입장도 소개한다. 차기진은 정약용이 1797년 정약용의 「자명소」 이후 천주교와의 단절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을 소개하고 았다. 다산 철학에서 서학의 영향을 찾는 연구 역시 소개했는데, 다산 경학과 서학과의 관계를 부정하거나, 다산의 탈주자학 경향을 중시하며, 자신도 모르게 천주교 교리들이 취사선택되었기에, 반서학적(反西學的) 요소도 존재한다는 입장, 다산 철학에 천주교 교리서의 영향뿐 아니라 서양 철학의 영향까지 있다는 견해로 나뉜다.
이봉규는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근대론의 시각을 중심으로-」에서 근대론적 시각에서 당시까지의 연구를 정리하고 있다.
2007년 백민정의 「정약용에 대한 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에서는 정약용에 대한 기존의 철학 연구를 정리하고 있으며, 김문식과 구만옥은 학술지 『다산과 현대』에 각각 역사학과 자연학 연구의 경향을 정리한다.
근대의 다산 서학에 대한 연구는 이능화와 안재홍, 백남운 등에게 주목되었는데, 특히 백남운의 다산 서학사상에 대한 평가는 현재의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과 유사하다. 이외에도 사회주의 계열과 가톨릭 측에서 일제시기에 정약용과 서학 사상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졌다.
광복 이후에는 1970년대 박종홍이 다산 철학에 서학, 천주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면서도, 많은 다산 연구들이 그의 연구들에서 파생되었다고 할 정도로 혜안을 보여주었다. (56~58쪽 참조)
1950년대에는 홍이섭이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에서 다산학에서의 서학의 영향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이을호는 1960년대에 『다산경학사상연구』를 통해 다산 경학에서 서학의 연향을 찾아내고자 하는 선구적 연구를 했으며, 1960년대의 연구 경향을 계승한 윤시순은 다산의 실학적 경학관을 주목하고, 다산이 성리학적 경학관을 부정했다고 평가했다.
1970년대에는 앞서 살펴본 박종홍처럼 그의 철학에 있어서 원시유학의 영향에 주안점을 두면서도 서학의 영향도 간과하지 않으려는 연구들이 나왔으며, 1973년 이상은은 다산이 원시유학의 상제관을 받아들인 학자로 분류하였다.
1980년대 이원순은 앞선 박종홍의 입장에 동의하면서도, 그의 저술과 함께 주변인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다산 사상에서의 서학 사상을 탐구해보고자 했다. 이원순은 다산 사상에서 서학의 영향을 찾는 데에 주력하였다. 이는 홍이섭과 박종홍의 견해를 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국교회사 측은 정약용과 천주교와의 연관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1976년 조광은 「정약용의 민권의식 연구」에서 그의 정치사상 내지 민권사상 형성에 서학이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개 예상하고 있다.
또한 허우봉은 1977년의 논문에서 다산의 「저명소」나 자찬묘지명 등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왜곡된 면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는 김영호의 『여유당전서』 텍스트 비판 연구에도 영향을 줬다. 하지만 허우봉 역시 기본적으로는 다산이 천주교 신앙을 포기했다는 입장이다.
한우근은 「다산사상의 전개」라는 논고에서 다산 사상 연구의 의미를 고찰한다. (64쪽) 특히 1983년의 학술대회는 정약용의 신앙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다루었는데, 최석우 신부는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로 회귀했다고 주장했으며, 정약용이 신도였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교회 측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반박에 대해 반박했다. 이러한 견해에 김옥희 수녀도 동의했다.
그러나 김상홍은 이러한 한국 천주교 측의 견해를 반박했다. 박동욱은 『목민심서』 안에서 그의 서학사상을 추출하고자 했으며, 이는 다산의 1표 2서로 대표되는 경세서를 통해 조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유권종은 『다산예학 연구』에서 예학 측면애서 볼 때, 서학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2000년대에는 더욱 다양한 연구들이 등장하였다. 앞서 살펴본 차기진은 다산의 학문을 주자학 비판- 수사학 회귀- 서학수용-새로운 세계관 형성으로 정의했다. 이봉규는 다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것을 주문했다. 송영배와 안영상은 다산 사상에서의 『천주실의』의 영향을 주목했다.
조성을은 「정약용과 교안」이라는 논문을 통해 다산 출생부터 1795년까지 여러 기록을 종합해 다산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조명하였다.
김영식은 2012년 「서양과학에 나타난 정약용의 태도」라는 글에서 정약용이 「자명소」에서는 서양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실제로 정약용은 서양과학에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구만옥은 학계의 다른 한편에서는 다산이 서양과학기술의 실용성을 주목했으며, 서양과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입장도 있다.라고 반박하며 김영식의 견해의 편향성을 지적했다.
다음 장은 다산의 천주교 신자론에 대한 논점의 정리이다. 정약용이 생애의 만년에 천주교를 회복했느냐는 논쟁거리 중 하나로, 저자는 우선 이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우선 다산의 만년 천주교 신자설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를 토대로 한 달레의 교회사 서술에 의지한다.
이를 학술적 성과로 발표한 최석우 신부는 다블뤼와 달레가 주목한 『조선복음전래사』를 정약용이 저술했다고 주장한다. 이를 보완하여 1993년 발표한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에서 다블뤼의 비망기가 황사영 백서와 이기경의 진술, 교회설립 때부터 당시까지 생존했던 교인들의 증언을 확보했고, 다블뤼가 결정적으로 도움받은 자료가 『조선복음전래사』였기에 다블뤼와 달레의 기록에 신빙성이 있다고 주장했다.결론적으로 최석우는 다산을 ‘유학자인 동시에 천주교인’이었다고 규정하였다.
김옥희 역시 최석우 신부처럼 다산의 만년 신자설을 긍정한다. 또한 최석우는 다산 신앙의 추이를 활동기(1784~1795) 배교기(1795~1811) 회심기(1811~1836)으로 나눈다. 주목할 점은 정약용 배교 시점을 진산사건 이후가 아닌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천주교인을 회교시킨 1795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옥희도 동일하다.
신자설의 부정론은 김상홍을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동조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김상홍의 논문과 그의 견해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117쪽~124쪽)
해당 연구는 당시(2012)까지의 정약용의 서학, 천주교 문제에 대해 연구사를 정리한 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논문의 저자가 교회사 연구자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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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최제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