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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문집, 도서관에서 대출>

본 감상은 작성자의 휘발된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되어 내용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박 시 내 말이 틀림



서문

오늘, 나는 한 노인과의 장장 6일을 걸친 긴 대화를 끝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그 노인의 말은 이제 없다. 나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곧장 노인의 이야기를 한 번 정도만 되짚은 뒤, 그가 원래 있었던 자리로 보내주었다.

그토록 많은 말이 있던 자리의 마지막에는 단 한 마디만이 우리의 모든 순간을 정리하고 있었다.


1980년.

파리에서 죽음을 맞다.

.

.

10월 25일,

일찍이 월 말에 해야 할 일을 모두 해치워 여유가 생긴 나는 유유히 6일의 시간을 닫힌 방에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몽롱한 정신을 일깨워줄 밀크티와 함께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내가 착실히 준비를 마치자, 노인은 마침내 긴 시간 침묵으로 매달려온 파이프 담배를 입에서 놓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노인의 직계(그리고 슈바이처 박사가 조금 먼 친척이라는 아주 소소한 정보와 그에 대한 경의)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을 낳은 뒤 죽어버린 가련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어찌 보면 노인을 지금의 자리로 밀어넣은 자신의 외조부 이야기와 함께.


노인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경멸하고 있었는데, 이야기 내내 줄곧 그 어린 날들을 '연극'이라 표현하였다. 그는 함께 사는 외조부를 위해 완벽한 손자가 되었으며, 외조부 역시 그를 위해 완벽한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정확히는 두 사람 모두 그 장면을 '연출' 했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자신은 마땅히 사랑받는 대상이었으며, 그로 인해 가족이 지닌 모든 문화가 세습되고 보존되게 된다고 그는 설명했다.


놀랍게도 이에 대한 설명이 초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노인은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노인은 말을 끊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구토가 나올 것 같아 여기에서 이야기를 잠시 그치고 다음날을 기약했다.



10월 26일~27일

어제 했던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자리를 펼쳤다. 물론 노인의 이야기는 또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다행히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 만났던, 서고와 종이의 액자에 걸린 채 광휘를 뽐내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플로레르, 위고, 이름만 들어도 알 영웅들. 그는 책을 읽었다. 그의 외조부 역시 그들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외조부는 그들의 재능에 경의를 표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에게 깃든 성령을 사랑했다고. 그의 집안은 그 시대 풍조에 맞게 독실한 듯 행동하면서도 그렇게까지 신앙심이 깊지는 않은, 그런 종교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외조부는 아직 종교에 힘을 맡기고 있었다... 아마도. 이 기억은 확실하지 않음을 밝힌다. 뭐, 아무튼 외조부는 플로베르나 위고를 믿지는 않고, 그들에게 깃든 성령을 믿었다. 외조부는 그 위대한 작품들에 독일어 주석을 달아 독본으로 묶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읽기'라고 노인이 명명한 이 이야기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상(1차 대전이 일어나고, 영화가 막 태어나는 등)과 함께, 현학적인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주를 이룬다.


일찍이 아버지가 없어 자신의 필요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그는, 어느 날 자리에 없는 친한 사람에 대한 외조부의 탄식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생각하게 된다.


즉, 할아버지는 내가 없어져도 나를 저렇게 찾지는 않을 거야.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내 생각엔 제법 어린아이다운 것 같은데, 노인은 이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내놓는다. 나는 이틀에 걸쳐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


'읽기'의 요지는, 다소 불안정하다면 불안정한 가족에서 존재 의의를 고심하던 노인이, 오직 평화 유지를 위한 연기를 통해서 그 의의를 찾다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책을 읽음으로 가정의 모든 문화와 평화를 유지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10월 28일

토니오 크뢰거라는 젊은 예술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잊어버린 것 같았지만 아주 좋았다.



10월 29일

노인은 어린 시절 서사시를 좋아했다. 물론 노인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영웅 놀이를 하는 자리에는 끼지 못했지만, 대신 책 속에서 무한한 세계를 모험하는 수많은 위인들을 보았다. 그리하여 노인의 첫 창작이 시작되었다. 어릴 때, 머릿속에서 나만의 가면라이더나 파워레인저를 한 번쯤은 그려 본 이라면 이 단락에서 노인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어린 노인은 스스로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어 악당들을 물리치고, 세계를 모험했다. 노인은 그것을 통해 세계의 실재를 감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내 창작은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노인은 스스로 연기하는 일에 싫증이 났다...라는 말을 아주 길게 늘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전 번과 같이 여기에서 또 한 번 내일을 기약했다.



10월 30일

노인은 마침내 자신이 처음 쓴 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이 상상하던 서사시를 글로 옮겼고, 그로 인해 천재 취급을 받았다. 물론 실제로 본 작문 시험에서는 영 좋지 못한 결과를 보여주었지만, 어린 노인은 새로운 창작을 통해 실체가 없던 세계의 모습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노인의 차후에 종교와도 같은 신념을 새겨준 일이 발생했으니, 조부와 그 지인이 그를 '차후 글을 쓰게 될 애'라고 칭한 것이다. 우리가 아는 장폴 사르트르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여기에서 서술되는 그의 신념이 다소 독특하다. 그가 얻게 된 신념이란 인과와 시간 순서가 뒤바뀐 것이었다. 그는 먼저 어린 자신이 상상했던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느 날 독일어를 가르치는 교수가 될 것이다.. 지방 생활을 고단하겠지만 여유가 있어 틈틈이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공개되지 못한 소설이 나의 서랍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러다가 내가 그것들을 두고 홀연히 사라진 날, 방안을 뒤져본 집주인이 주인 없이 세상을 떠돌던 원고들을 찾는다. 그는 깜짝 놀라 이것을 무슨무슨 출판사에 보낸다. 그때부터 신문에서 그 원고가 거론된다. 사람들은 찻집에서 이야기한다. 아니, 장폴 사르트르라니.'


이 전문은 정확하지 않다. 앞서 밝혔듯이 그의 말들은 이제 내겐 없다. 그렇기에 이것은 온전히 나의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 대략적인 내용만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가 작가란 존재에 대해 '미리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작가는 이미 탄생하여 죽음까지 이르렀고 그건 아주 어릴 적부터 정해졌다.라는 것. 실제로 그가 외조부의 책장에서 만나본 이들은 모두 그런 식이었다. 그가 읽은 위인전에서 위인들은 모두 위대한 계시와(사실은 편집부가 아주 문학적적인 장치로써 삽입한) 치밀한 복선을 통해서 그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장폴 사르트르는 이미 위대한 작가이며, 수없이 많은 작품을 구토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 딸 손주는 물론 외조카까지 그의 자서전을 보고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노인은 다소 미래적으로 생각한 모양인지, 2013년에 읽히느니 마느니 40세기에 어떻게 작품이 되니 같은, 미래학자들이 할 법한 말들을 하였다. 이게 통찰력이 있다고 해야 할지 뭐라 할지..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후 그는 이것을 성령 삼아 인생을 살아간다. 날이 좋으면, '나는 작가가 될 테니 계시에 걸맞은 날이로군' 하다가, 또 날이 나쁘면, '나는 작가가 될 테니 아무래도 좋군.' 하는, 아Q 버금가는 무적의 정신승리법으로 말이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이야기는 그의 학창 시절 친구들로 이어진다. 노인은 이곳에서 드물게 슬픈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가 말했던, 작가가 될 것이라 말했던 어떤 병약한 친구와, 또 이야기의 기승전결이랄 것도 없이 먼저 생의 결을 맞은 다른 친구의 이름을, 아로새겼다.


그리고 이야기는 노인의 지금을 향해 이어졌다.



10월 31일

우리의 말은 종막을 맞이했다. 노인은 그때는 정말 멍청했다고, 또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주절주절 떠들었다. 나는 변화무쌍한 그의 표정을 또 이런저런 표정들로 응수했다.

노인은 진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모든 아이란 으레 진보하는 법이고, 또한 자신 역시 그럴 것이라 믿었다며. 그리하여 자신은 줄곧 그것으로 살았고, 지금까지도 자신의 자신작은 늘 자신의 집필작이었다며. 그는 말했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지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이제 그 성령과도 같던 믿음을 버렸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진보는 또 무엇이었나 하는 의문만 남았으나, 그래도 노인은 쓰고 있었다. 그래도 썼다. 그럼에도 쓰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작가, 사르트르라 하였다.


그는 이후의 이야기를 또 다른 최고작에 써 내려갈 것이라 말했지만, 아쉽게도 그 말을 내가 듣는 일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그가 6일 동안 했던 말은 사실, 지금 내가 남긴 이 일련의 말들처럼 얕지 않았다. 다만 나의 얕음이 이 말들을 이렇게 축조하고 말았다.

아마 그가 이 말을 보면 그는 피우던 파이프 담배를 집어던질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나는 그의 또 다른 말들을 들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그를 돌려보내며 다소 어긋나게 그려진 그의 얼굴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것은 여전히 괴팍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고 괴팍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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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사르트르 다음 읽을 거 추천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