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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소품집>을 읽고 있다. 여기서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에 관한 소견들"은 3번째 챕터이다. 예전에 퍼트남의 논문에서 본문에 대한 감상을 읽은 적이 있는데, 퍼트남이 보기에 비트겐슈타인은 프레이저가 설명하는 미개인들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촉구한다고 이야기한다.
2.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비트겐슈타인의 글 중에 가장 산만하다.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코멘트가 적힌 공책을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3. 프레이저는 <황금 가지>라는 책에서 문명의 선형적 발전양상 같은걸 주장한 것 같다. 프레이저의 표현을 따르면, 미개하고 주술적인 문화에서 과학적이고 서구적인 문화로 발전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본문의 내용 내내 프레이저의 이런 가치관,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비난한다. 특히 미개인들의 미신성에 대한 프레이저의 태도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이렇게 말했으면 한다 : 이 사람들의 견해들을 기술하기 위해 프레이저가 "유령"이나 "망령"과 같이 그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낱말을 준비해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 저 미개인들과 우리의 근친성을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4. 책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단락이다 :
역사적 설명, 즉 하나의 발전 가설로서의 설명은 자료에 대한 단지 한 가지 방식의 요약-자료의 개요-이다. 자료들을 그것들 서로의 관계에서 보고 하나의 일반적 그림 속에 총괄하는 일은 그것을 시간적 발전에 관한 하나의 가설의 형태에 담지 않고도 똑같이 가능하다. ...
일목요연한 묘사란 개념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묘사 형식을, 우리가 사물들을 보는 방식을 지칭한다. (외견상 우리 시대에 전형적인, 일종의 '세계관'. 슈펭글러.)
이 일목요연한 묘사가 상호이해를 성사시키며, 상호이해는 바로 우리가 "연관들을 본다"는 데 존립한다. 그런 까닭에 중간 고리들의 발견의 중요성.
그러나 가설적 중간 고리는 이 경우 사실들의 유사점, 연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이 타원을 점차 원으로 이행시킴으로써 원의 형태와 타원과의 내적 관계를 도해하듯이; 그러나 타원이 사실로, 역사적으로, 원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발전 가설), 단지 어떤 형식적 연관에 대해 우리의 눈을 예민하게 하기 위해서 하듯이 말이다.
5. 위의 단락을 저번에 읽었던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떠올린 프레게의 뜻-지시체 도식과 연관시켜보면, 비트겐슈타인이 일목요연한 묘사라는 표현에서 뭘 말하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트겐슈타인은 각각의 비유, 설명 방식이 서로 대응하는 연관을 통해 사람들이 (상호)이해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명료함은 수학의 수식과 기하학적 모형 사이의 연관관계를 이해하는 것 같은, "아! 같은 얘기구나!"싶은 느낌을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명료함은 실증적이거나 계량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에서, 함수관계인 수는 서로가 수리적으로 대응하는 것이지만 수학의 수식과 기하학적 모형은 비유적으로 대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 = 1에서 좌변의 1은 우변의 1과 수리적으로 대응하지만, y=x의 수식은 (대충 y=x 그래프 상상해보기) 그래프의 '선'과 비유적으로 대응한다.
6. 하지만 왜 "가설적 중간 고리는 이 경우 사실들의 유사점, 연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주장할까? 내 생각은 이렇다. 가설적 중간 고리가 일목요연한 묘사와 유사한 표현이라고 생각할때, 가설적 중간 고리를 '지시체'와 동일하게 보는 일은 과거 철학자들 (데카르트나, 프레게)처럼 어떤 발전 가설을 '정초'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되면 (상호)이해의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 중간 고리가 어떤 경향성을 가져버리게 된다. 그게 왜 문제가 될까? 또 내생각은 이렇다. 그렇게 하나의 경향성으로 묶인 제시 방식들은 "우리가 사물들을 보는 방식", "우리의 묘사 형식"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내가 사물들을 보는 방식", "나의 묘사 형식"으로 환원되어버리기 때문이다.
7. 이제 나는 = 기호를 수리적 동치가 아니라 비유적 연관을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 결론적으로, 가족 유사성 = 가설적 중간 고리= 일목요연한 묘사 이다. 그리고 나는 가족유사성을 어떤 지향적 수사, 정초적 개념으로 사용하려는 사람을 위해 비트겐슈타인이 가족유사성이라는 개념을 고안한게 아닐까 싶다.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사변적 철학을 정초하기 위해 가족유사성을 사용하는 일은 너무나 지리멸렬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리멸렬함을 느낀 철학자가 정초를 포기하도록 한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8. 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그만두고 잠깐 교사생활을 했는지 알 것 같다. 명료함에 대한 몰두는 자신의 도덕관을 만족시킬 수 있을 뿐더러, 욕망에 대한 일종의 승화활동이었던게 아닐까? 정열을 포위한 사원, 오직 서술만으로 이루어진 철학활동, 지시체 없는 뜻-지시체... 비트겐슈타인의 카테고리는 "교육철학"에 들어가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묘사 형식이 모두의 묘사 형식이 되기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거꾸로 모두를 이해해보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그렇게 낭만적이고 온순한 장소는 학교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마저도 없어지는 중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이 황금가지를 상당히 많이 깐건 알았지만 본인 책 한 챕터를 할애해서 깔줄이야....
비트겐슈타인이 생전에 출판한건 논고 밖에 없어. 철학적 탐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강의노트나 메모같은 것들 모아서 출판한것들이 대다수라 난잡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