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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서학과 유학의 만남-18세기 말 천주교 논쟁과 정조의 대응」, 『정치사상연구』, 4, 2001 정리
저자는 당시 기존의 천주교와 서학 관련 연구들이 종교사나 사상사에 치중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정조기의 정치사와 서학 문제를 연결시키고자 했다. 정조는 재위 중반부인 12년 이후 채제공을 정승에 기용하여, 신해통공, 선세자 추숭, 수원화성 건설 사업 등의 정책을 확대해 나갔다. 이는 다른 당파들에게는 불만사항이었고, 이러한 불만이 서학 문제를 기점으로 남인에 대한 정치 공세로 전환되었다.
서학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은 1785년의 을사추조적발사건 당시이며,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가 사학(邪學)으로 규정되었으며, (유하원 상소, 9년 4월 9일) 이를 성토하는 통문과 상소가 잇따랐다.
두 번째 반회사건인 1787년의 이기경 고발 사건은 이기경이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서학을 접하고 있다는 것을 고발한 사건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제사 문제를 제외하면 이승룬과 이기경의 입장 차이는 크게 다르지 않았고, 고변의 이유를 남인들 사이의 개인적 경쟁심과 서운함, 채제공의 잘못된 처신을 이유로 꼽고 있다.
진산사건으로 천주교 문제가 더욱 커진 후, 채제공은 온건한 대응을 주장하였고, 정조 역시 이를 공격하는 다른 정파들에게 패관잡기 문제를 거론하며, 정학(正學)을 세울 것을 주문한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신앙인으로 순교했지만(달레의 『천주교회사』는 두 사람의 내면에 집중한 기록) ( 『실록』 15년 11월 7일)
그러나 이승훈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관심을 끊었음을 진술하였으며, (15년, 11월 8일) 정약용은 「자명소」를 통해 이를 다시 강조하였다. (21년, 6월 21일)
장조는 공서파의 서학 관련 공격을 정치적 공세로 받아들였고, 이를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킨 홍낙안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거기에, 이를 채제공 독상체제에 대한 다른 정파의 도전이라고 보고, 서학 문제의 확산을 막고자 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이다.
이는 평택 유생 권위의 비방으로 이승훈이 청금록에서 삭제된 사건을 조사할 때에 더욱 잘 드러난다. (19~21쪽)
정리하자면 저자는 정조대의 서학 논쟁을 다룬 이전의 연구들을 참고하면서, 서학 문제에 대한 정조의 대응을 정치적인 방향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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