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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을 아십니까?> 정교회출판사



역사는 참 신기한 취미다. 과거 사람들의 삶의 총체라, 그걸 공부하다 보면 흥미가 어디로든 옮겨갈 수 있다. 나는 동유럽을 공부하다가 정교회(Orthodox Church)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그들의 전통에 대해서 말이다.

직접 찾아간 성당에서 성찬예배 (Divine Liturgy)를 들으면서, 나는 마치 내가 정말로 비잔티움 제국에 떨어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돔을 타고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성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하고 노래하는 사람들. 무릎을 꿇고 성체를 영하는 걸 지켜보는 과정. 숱한 향을 사르는 모습. 이 모든 이국적인 풍경들이 내 머릿속에 완전히 들어찼다.

그 중에서도 이콘(Icon), 그러니까 성화(聖畵)가 눈에 띄었다. 정말로 중세 시대의 것 같은 화풍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중세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니 똑같을 수밖에 없다.) 그 아름다움에 끌려 정교회출판사에서 산 책이 이 책이다.

정교회의 이콘은 완벽히 정해져 있는 양식에 의해 그려진다. 손가락 하나까지 규정되어 있다고 할 정도이다. 이는 이콘이 예술이요, 동시에 성경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콘에는 성경의 내용이 압축되어 들어간다. 이를테면

이렇게 손을 뻗는 건 대화하는 걸 나타낼 때 사용된다. 이런 식으로 성경의 장면장면이 하나의 그림에 오롯이 들어가는 것이다.

교회에서 이런 식으로 성경의 내용을 전하는 이유는, 문맹자는 성경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맹자가 성경을 접하려면 이콘과 성가를 통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인본주의가 느껴지는 지점이다.

그렇게 보니 이콘의 화법이 고정되어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기독교도 입장에서 성경의 내용이 곡해되는 건 가장 피하고 싶은 일 아니겠는가.

이콘의 화법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인간의 얼굴은 일정 부분 왜곡되어 표현된다. 이마는 넓게, 눈동자는 타오르듯 (이는 이집트 문명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특성이다), 코는 좁게 등등. 이렇게 현실은 '보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 그림의 의도에 맞게 변형된다. 그리스적 사실주의와의 가장 큰 차이다.


(이집트 파이윰의 초상화. 눈동자의 표현법은 이콘 예술로 계승되었다.)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의 유명한 이콘을 보자. 그리스도의 양 눈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이는 한쪽 눈은 자비로운 그리스도를, 다른 한쪽 눈은 심판자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상징을 이용한 표현 방법을 알게 된 후 하나하나 그림에서 뜻을 찾아내 보면, 이콘들이 나타내는 한결같은 뜻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혹자는 독창성 부족 운운하며 정교회의 미술을 폄하한다. 그런가 하면 아예 언급을 안 하기도 한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비잔틴 예술을 짧게 언급하고 끝낸 게 얼마나 아쉬웠던지.

하지만 나는 이콘이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제작의 목적을 훌륭히 완수하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다." 이것을 미술의 판단 기준 중 하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가 말한 전위 예술을 그 목적으로 할 때, 예술품은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현실을 직시하게 하면 좋은 예술이다. 이런 목적은 제작자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정교회의 입장에서, 모두가 구원이라는 영원의 세계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 그림이 이콘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림에서 모종의 감동을 받고 결국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 목적을 잘 완수해 내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정교회에 매료되는 사람들의 꽤 많은 수가 이콘에 매료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목적은 달성된 것 아닐까.

예이츠는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에서 이콘을 영원의 세계로 그렸다. 나도 비슷한 부분에서 이콘에 매료된 것 같다. 수백 년간 한결같이 자리해서, 단 한 가지 길만을 가리키고 있다는 게 내가 느끼는 이콘의 매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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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도상학 공부도 해보고 싶음. 뭔가를 찾아내는 거 되게 좋아하는 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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