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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o 파우스트 스포도o)

이 책을 언젠가 원서로 읽어보리라.
번역의 한계가 너무나도 드러난다.
“I try all thing ; I acheive what I can”
이라는 명문장이
”온갖 것을 다 시도해 보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로 번역이 되다니.. 너무 아쉬울 뿐이다.
 
 책의 역자는 이 소설을 니힐리즘이라고 했다. 멜빌 또한 독실한 칼뱅교인 어머니를 두었기에 무시 못할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작품을 보면 전반적으로 기독교, 그 중에서도 칼뱅교에 근거한 내용이 작품의 초반부를 지배한다. 그러나 모험이 진행되어가며 그러한 신념은 변화한다.

 ‘모비 딕’은 자연, 신 그 자체이다. 그는 신이 창조한 생명이며 인간으로서 필적할 수 없는 거대한 불가항력이다. 그것이 주는 공포에 평범한 이들은 패배하고, 도망치지만 고귀한 영혼을 가진 에이해브는 그것에 오만히 필적하려고 도전장을 내민다. 그의 삶은 바다였고, 그에게 안락한 지상의 삶과는 달리 바다는 언제나 위협이 도사린다. 그는 오랫동안 모은 부와 그를 품어줄 안락한 가정이 있지만, 그의 삶을 찾아 -오로지 투쟁만이 있는- 바다로 또 다시 나간다. 왜냐하면 거기에 그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투쟁’이라는 말과 같다.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고래 놈아, 나도 너한테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해와 달과 별들아, 보라! 나는 너희를 영혼을 저당 잡힌 어떤 놈 만큼이나 훌륭한 살인자라고 부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잔을 건네주기만 한다면 나는 너희와 잔을 부딫히며 건배하고 싶다』
 - chapter 135 -

이 부분은 나에게 ‘네 적을 사랑하라’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으며,

『・・・그런데 태양은 여섯 달 전에 백양궁에서 폭풍우의 상징인 분점으로 들어가고 있다! 폭풍에서 폭풍으로! 그것도 좋다고 해두자. 진통 속에서 태어난 인간은 고뇌 속에서 살고 고통 속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도 좋다고 하자. 여기에 재난이 닥쳐오는 것을 꿋꿋이 견뎌내는 사나이가 있노라! 그것도 좋다고 하자』
 - chapter 99 -

『그렇다면 큰 소리로 웃고 ‘앙코르’를 외쳐라! 』 

 - chapter 135 -
 이와 같은 부분들은 니체의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삶이여,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더!”
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소설은 비극이다. 우리의 삶도 비극이다. 
그러나 원래 비극에 슬픔이란 뜻은 없다. 비극의 유래는 디오니소스 신을 경배하는 행위로서 오히려 부활, 도취와 같은 ’극‘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드라마(Drama)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의 "행위를 하다(action)" (to do) 란 뜻의 단어 "δράω / drao"에서 부터 나온  "행위/연기 (action)"이란 뜻의 "δράμα / drama" 에서 나왔다. 즉 삶은 드라마, 그리고 비극이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작중에서도 에이해브는 모든 고귀한 영웅들은 가장 깊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에게도 그러한 깊은 고통과 슬픔이 존재한다. 

”창조자들이여, 그대의 삶에는 가슴 아픈 죽음이 깃들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순간성의 대변자이자 옹호자가 될 수 있다. 언제나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 창조자는 동시에 아이를 잉태하는 어머니로서 출산의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

 에이해브는 작중 초반에는 악당의 면모를 가진 인물로 묘사되어 독자들의 경계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를 응원하고있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으며 악마적 형상을 가진 그를 우리가 응원하는 이유가 뭘까? 우리가 그러한 삶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도망치기만 하는 삶을 바라지 않는다. 그 무엇이든 나 자신으로 꿋꿋히 서있기 위해 맞서는 ‘삶’.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삶일 것이다.

『오오, 고독한 삶의 고독한 죽음! 오오, 내 최고의 위대함은 내 최고의 슬픔 속에 있다는 것을 지금 나는 느낀다. 허허, 지나간 내 생애의 거센 파도여, 저 먼 바다 끝에서 밀려 달어와 내 죽음의 높은 물결을 뛰어넘어라!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녹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관도, 관대도 모두 같은 웅덩이에 가라앉혀라! 어떤 관도, 어떤 관대도 내 것일 수는 없으니까. 빌어먹을 고래여, 나는 너한테 묶여서라도 여전히 너를 추적하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다. 그래서 나는 창을 포기한다!』

 이 말과 함께 에이해브가 모비 딕에게 끌려가며 작품이 끝난다. 모비 딕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그 죽음에는 에이해브가 함께한다. 마침내 그는 신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 는 괴테의 <파우스트>2부에서 파우스트 박사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스스로 결실이 없는 파도는 그 비생산성을 퍼트리며
 사방팔방으로 접근해 온다. 
 부풀고 커지고 구르면서
 황량한 해안의 보기 싫은 지역을 뒤덮는다.
 연이은 파도는 힘에 넘쳐 그곳을 지배하지만,
 물러간 뒤엔 아무것도 이루어진게 없다.
 그것이 날 불안케 하고 절망으로 이끌었도다!
 이 참을성 없는 원소의 맹목적인 힘이라니!
 그리하여 내 정신은 감히 비약을 시도하려는 것.

 여기서 나는 싸우고 싶다. 이것을 이겨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 물결이 아무리 넘쳐도
 언덕을 만나면 휘감기듯 돌아가니까.
 그것이 아무리 오만하게 날뛰어도
 약간의 높이면 그것과 당당히 맞설 수 있고,
 약간의 깊이면 그것을 힘차게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나는 재빨리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저 도도한 바다를 해안에서 쫓아내
 축축한 땅의 경계선을 좁히고,
 파도를 저 바다의 안쪽으로 밀쳐버리는
 그런 값진 즐거움을 얻어보겠노라고.
 나는 이 계획을 차근차근 검토해 보았다. 
 이게 내 소망이니 과감히 진척시켜 주게나! 』

  그는 결국 허무와의 투쟁에서 이겼다.
  그리고 나도 그처럼 이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