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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기원



우리는 왜 태어나는가, 우리는 왜 병에 걸리고 죽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생각의 고리가 부처의 위대한 여정이 되었고, 이 질문에서 시작된 것이 불교다.



괴로움을 겪는 부처는 일평생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주제로 고심해왔고 해결책을 얻기 위해 수행했다. 현재 부처의 가르침으로 알려진 여러 경전들이 있지만, 사실 어떤 것이 진짜 부처의 가르침인지 확실하진 않다. 하지만 사주도 여러 군데서 보면 공통되는 부분이 확실한 자기의 팔자이듯, 부처의 말씀도 여러 경전 중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바로 괴로움이 무엇인지, 괴로움의 소멸하려면 어떻게 정진해야 하는지 가르침이 담긴 사성제이다.




사성제



존재는 무더기에 지나지 않으며 무상하기에 괴로움이며(고성제), 괴로움은 갈애와 탐진치에 의해 일어나며,(집성제), 괴로움의 발생원인을 제거해야만 괴로움이 소멸하고(멸성제),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 여덟가지 방법으로 정진하는 것(도성제)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성제인데, 사성제를 깨치기 위해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괴로움은 물질로 이루어진 어떤 존재와 접촉했을 때 생기는 느낌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때로는 행복함을, 때로는 괴로움을, 때로는 평온함을 느낀다. 하지만, 느낌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부처의 올바른 시선인 법으로 보았을 때 괴로움이다. 왜냐하면, 조건에 따라 행복함, 괴로움, 평온함이 바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생기는 결과인 연기(연기는 조건을 의미하기도, 조건에 따른 결과를 의미하기도 한다)이다. 조건을 충족시키면 우리는 행복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조건이 사라지게 되면 행복하다고 느꼈던 감정들은 사라지기에 무상하다. 그렇기에 느낌으로부터 영원한 행복이 도출될 수 없다. 행복은 모든 괴로움이 소멸하고 되살아날 수 없는 상태이다. 만약 이를 알지 못하면 무명(어리석음)이며, 느낌에 집착한다면 갈애(집착)이 일어나고 취착이 되어 괴로움이 발생한다. 그리고 해로운 의도가 작용하여 해로운 업을 짓고 또 다시 괴로움의 근간인 탄생에 이르게 된다. 또한, 흔하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대상을 인식하고 의도하는 라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아가 존재한다고 하려면 나는 모든 조건에 흔들리지 않으며 모든 것을 통제가능한 영원한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라는 존재의 생각과 신체는 연기에 따라 바뀌게 되고 영원하기는커녕 변화를 일삼는다. 자아가 있다고 믿는 잘못이 무명이며, 본질적으로는 무아이다.



하지만 잘못된 인식, 감각적 욕망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 그 행복에 집착하는 마음, 그로 인해 발생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와 같은 해로운 법의 발생으로 이어지고 해로운 업의 결과로 다시 또 세상에 태어나 괴로움을 겪는다.



그렇다면 이 잘못된 인식을 끊는 것이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임을 알고, 바른 인식과 태도로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며 바른 지혜를 얻어 삼매에 들어 정진한다면 우리는 감각에 대한 욕망을 무상한 것으로, 존재를 무상한 것으로 깨닫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자애·연민(자비)에 따른 변화와 알빠노



요즘 누칼협과 비슷하게 빈번하게 온갖 커뮤니티에서 보이는 말이 있다. “, 주절주절~~” “(내가) 알빠노?” 알빠노라는 표현에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결여되어있다. 하지만,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카네기를 읽을 바엔 차라리..)을 읽고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상대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라는 말에 큰 감명을 받고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는 나로서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역지사지라는 방법의 실현이 너무나도 쉽게 관계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상황에서, 너무나 간편하고 손쉽게 화제를 흘려보내는 이 알빠노라는 단어가 꼴보기 싫은 세력들에 대해서는 사용될때는 너무나 호쾌하면서도 한편으론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이 세글자의 딜교환의 정도가 너무나도 사기스러우면서도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자애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상태에 이르기 바라는 마음이고, 연민은 자신이 슬픔에 빠져 괴로움을 겪지 않으면서 타인의 슬픔을 덜어주는 마음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역지사지의 태도로 타인의 마음을 살피는데는 신경썼지만 타인에 대한 직접적 도움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기에, 이 점들을 경시하곤 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스스로 행할 수 있어야만, 그런 방식으로 타인을 강화시켜야만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의 자비로움을 경험하면서 타인의 행복을 위한 자애와 연민(자비는 그 자체로 바른 지혜다.)으로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면 내가 타인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행복의 상태로, 새로운 관계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은 오히려 타인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단순한 이기심의 결과가 아니였을까? 남을 생각한다면서 사실은 남한텐 무관심한 자기 모순적 존재가 아니였을까? ! 이것은 재앙이다. 왜냐하면 자기 모순적 존재가,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삶은 최악의 삶이기 때문이다.



불교용어에 따르면 최근 과거의 업 때문에 후회가 되고 그 후회에 집착함으로써 괴로움을 겪던 요즘 우연히 읽게 된 이 책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그리고 장래를 살아가기 위한 동력을 다시금 얻게 되었다. 모든 존재들은 연기에 따라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느냐에 따라 변화한다. , 무상한 것이므로, 그 모든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것에서 파생하여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그 언행에 따른 결과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 이것으로 내 인생을 바꾸고 타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점, 이 과정에서 선한 업을 쌓을 수 있다는 점. 지나간 과거의 날들을 되돌아보며 교만하고 오만한 나로부터 한 꺼풀 허물을 벗어던지고 타인과 서로 의존하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는 그 관계에 대해서, 부처님의 자비로움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의 나날들에 고요한 평온이 올 수 있음을 깨달으며 글을 마친다. 근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든말든 니네가 알빠노? ㅋㅋ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