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의 사유에 대해서 잘 들여다보면, 실은 내 사유와 행동 대부분이 외부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예컨대 ‘코카콜라’, ‘스타벅스 돌체 라떼’, ‘나이키 신발’, ‘힙합 음악’은 내게 주어진 여러 선택지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제3세계 노동자에게는 이러한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3세계 노동자보다 행복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으로 우리는 제3세계 노동자에게 주어진 선택지들을 경험해볼 수조차 없다는 점에서, 우리와 제3세계 노동자는 정확히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돈을 잘 버는 이도, 못 버는 이도, 어른도, 아이도 결국 자기에게 주어진 선택지 안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이는 취향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 사유 전체에 적용됩니다. 한 개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나의 언어는 가정과 학교, 사회와 국가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더 크게 보자면 기후와 지리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습니다. 이누이트 족이 눈을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 낸 수많은 ‘흰색’에 관한 어휘들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겁니다. 또다른 예시로 각 문화권에서 무지개의 색을 몇가지로 구분하는가를 살펴봐도 좋습니다. 오늘날에는 7가지 색으로 분류하지만, 과거 중국에서는 4가지 색으로, 쇼나(shona)어에서는 3가지, 리베리아의 바사(bassa)어에서는 2가지로 구분합니다. 이처럼 어느 지역에 사는가에 따라 언어는 달라지고, 이는 우리의 의식에 다시 영향을 끼쳐 ‘실제로’ 무지개가 7가지 색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태양의 스펙트럼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볼 수 있다는 사실, 그 중에서도 5-7가지의 색이 우선적으로 인지된다는 또 다른 (물리적 및 생리적)사실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역으로 문화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든 인간은 인간종이라는 동물적 한계에 갇혀 있음을 말해줍니다.
위의 예시는 무한히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알프스는 과거 유럽인들에게 이동을 가로막는 끔찍한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동수단이 충분히 발달된 오늘날엔 우리에게 숭고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미적 대상입니다. 이는 기술의 발전이 동일한 대상에 대해 전혀 다른 감정을 촉발시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아름답다는 자연적 감정조차 실은 사회적 조건에 의한 산물입니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사유란 관습 혹은 문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하고 자문합니다(직접 읽어보진 않았습니다. 간접인용). 그같은 견지에서 사유란 넓은 의미의 ‘기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 없이도 기계적으로 행동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휴리스틱이나 무의식을 여기에 연결시킬 수 있을 듯합니다.
혹자는 주어진 선택지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선택행위는 나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선 선택행위가 한 인간의 생리적, 사회적 조건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는 물론 불가능한 작업이며, 설령 그런 의미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더라도 그런 자유는 난쟁이처럼 쪼그라든 자유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없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인간은 여전히 인과율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수없이 많은 형태로 분화되는 진화 계통도나 생명의 나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값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물리적으로 폐쇄된 체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란 기존의 인과율을 끊어내는 힘이자, 새로운 인과율을 시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즉, 자유의지란 물리적으로 폐쇄된 체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란 없는 걸까요. 인간은 인과율에 종속된 기계에 불과할까요. 인간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역설적 방법으로, 신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부정신학’적 방법으로 자유의지를 구해낼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부정신학이란 신의 본질을 규정의 방식이 아니라 부정의 방식으로 파악하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 “신은 x이다”가 아니라 “신은 x가 아니다”라는 명제로 신에 다가갑니다. 인간의 제한된 인식이 지닌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신의 무한성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부정신학적 방식으로 ‘자유의지’를 파악하는 것은, “이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다”라는 형태로 나타날 겁니다. “코카콜라를 좋아하는 것은 내 자유의지가 아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귀하다는 내 생각은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내 자유의지가 아니다.” 즉, 인간의 한계에 대한 앎 속에서 자유의지는 역설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를 확장하면 다음과 같은 논리도 가능합니다. “내가 아무리 선행을 베풀어도 그것은 내 ‘자유의지’가 아니다, 나의 선행은 내가 가진 여러 조건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화목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가 선행을 베푸는 것은 기계적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학습되었을 뿐이니까요. 이같은 논리가 가진 파괴력은 인간이 공유하는 생각 대부분을 부수고도 남습니다. 선함이 선함이 아니고, 악함이 악함이 아니게 됩니다. 인간의 도덕규칙과 상식 대부분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인간사회의 규칙, 규율이 지니고 있는 타율성을 깨닫고 진정한 ‘선(善)’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에 대한 탐구는 여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도덕규칙을 의심하고 난 뒤의 내 선행을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손쉽게 단정지을 순 없습니다. 그 선행조차도 내가 지닌 조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폐쇄체계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갇혀버리게 됩니다. 자유의지는 흡사 신기루와 같습니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곧바로 사라집니다. 자유로운 행동은 사라지고 조건에 의한 현상만 남습니다. 물론 자유의지, 그리고 이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는 분명 존재합니다. 다만 인간이 인간 자신을 의심하는 한에서만 존재합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비틀어 말하자면, 주체(자유의지)는 모든 것을 회의하는 한에서만 존재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습니다. 영화는 1시간 반동안 같은 형태로 반복되는 마츠코의 운명적 연애사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인생은 "여기보다 더 밑바닥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타락합니다. 마츠코는 반복적으로 실수를 저지르고 끝내에는 폐인이 되어 삶에 대한 한 줌의 의지마저도 잃게 되지만, 마지막 한 순간에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마츠코의 조카 쇼는 그런 그녀를 보고 '신'이라 부른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원인의 결과물이라면,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연쇄살인마와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선사업가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빌 게이츠의 100억 쾌척이 아니라, 독거 노인이 교회 헌금함에 넣은 만원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마지막에 보여준 한 걸음은 기적이고, 신적인 것입니다.
다른 곳에 단 댓글인데 한번 가져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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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 무한도전에서 길이 말한 <돈키호테>의 엮은이 김경식씨는 게오르그 루카치 전문가이기도 하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은 근대소설을 '신에게 버림받은 시대의 서사시'라고 파악하는데 이 근대소설의 효시로 <돈키호테>를 꼽고 있다.
이 질문을 소포클레스랑 테드 창이 다른 방식으로 던졌지. 오이디푸스는 자유 의지로 어떻게 해서든 정해진 운명에서 도망가려 했지만 기가 막히게도 정해진대로 움직인 꼴이 되었고 네 인생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유 의지로 정해진 운명을 그대로 따라가는 선택을 하는데 과연 이 두 사람이 선택한 결과에 어떤 차이점이 있을지? 테드 창이 소포클레스에 화답한 거라고 갠적으로는 생각함
거기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반대의견인게, <오이디푸스> 읽다보면 오이디푸스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너, 그 잘난 예언능력으로 스핑크스도 처리못하고 뭐했음?"하고 되묻는 장면이 있음. 그러면서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의 이성과 능력으로 스핑크스를 물리쳤다"고 이야기함. 전체적으로 결정론적인 결말로 흘러가지만, 오히려 작품의 중요 주제 중 하나는 돌이킬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나타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봄.
https://m.dcinside.com/board/skepti/9596
이
글 댓글이 생각나는 글이네
읽어보았음. 다만, 내 입장에선, 본문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런 식의 자유의지는 쪼그라든 자유라서 그런 주체란 내 눈엔 그냥 사유-기계와 다를 바가 없음.
자유의지가 없었으면 좋겠다 제발
그 편이 편하지. 책임질 것도 없고, 따라서 죄도 없어지니까. 역으로 기독교의 원죄론이 가진 혁명성은 바로 모든 인간에게 "너에게 자유의지가 있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네 일에 책임져라"라고 묻는 거라고 봄.
그런 류의 자유의지는 오직 전지전능한 자만이 가질수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