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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구, 「조선후기 정치에 미친 西學의 영향 연구」, 동국대 정치학과 석사학위논문, 2002 정리
해당 논문은 서학이 조선후기 정치에 미친 영향을 다뤘다. 우선 해당 논문은 당시까지의 서학 연구사를 정리한 후, 중국에 서학이 유입되는 과정을 주목한다. 서학은 서양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에 유입되었다. 저자는 이를 수용한 중국의 학자들을 다음과 같이 세 그룹으로 나눈다.
첫 번째 그룹은 천주교와 서양 과학을 모두 받아들인 집단으로, 서광계, 양정균, 이지조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보유론적 입장에 호의적이었을 뿐 아니라 신앙도 받아들였다. 방이지와 황변 등의 학자는 서양 과학기술에는 관심을 보였으나, 신앙은 갖지 않았다.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한 학자는 허대수, 황종의를 비롯한 대다수의 유학자들이 있다. (28~29쪽)
또한 전례논쟁에서 도미니크회가 승리하고, 강희제 대에 포교를 엄격하게 금하기 시작하면서 예수회의 선교는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예수회는 1773년 해산되었고, 190년간(1583~1773)의 중국 선교 활동은 끝나게 되었다.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서학을 접했다. 1603년에 이방정과 권희가 『곤여만국전도』를 들여왔고, 허균은 광해군 2년(1610) 지도와 함께 『게십이장』이라는 서교서를 구득하였다. 또한 정두원과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문물을 조선에 소개하였다.
김육은 『시헌력』의 채택을 위해 노력하였다. 17세기 조선의 조정에서는 역법과 천문학에 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서양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만 했을 뿐, 전반적인 서양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했다.
18세기부터는 한역서학서가 더 많이 유입되면서 서학에 대한 지식인들의 접촉 역시 증가했다. 저자는 성호 이익과 성호학파의 서학 수용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중앙에서도 『고금도서집성』이나 『사고전서간명목록』등이 들어오며서 서학과 서양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이러한 결과, 서기수용론이 확산되었고, 서교 역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과 더불어 반서학 경향 역시 심해졌다. 주목할 점은 당시 반서학론자들은 서기와 서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반서기론을 주장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재이론 관념을 무시한 서양의 일식설을 비판한 이헌경이다. (41쪽)
이러한 상황에서, 서기와 서교를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학자들은 ㅛㅏ힉의 ‘중국 원류설’을 펼치기도 했다. 이는 홍대용, 서명웅, 그리고 앞서 살펴본 이헌경에게서도 나타난다. 특히 이헌경은 『천학문답』에서 중국 원류설을 근거로 서양의 역산과 천문 관련 지식을 수용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42쪽)
천주교와 관련해서 이승훈의 세례 이후 조선천주교회가 성립되었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커졌다. 1787년에는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성균관 반촌에서 교리연구를 한 일이 발각되는 정미반회사건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많은 서학서가 불태워졌다. 또한 서학서의 유입을 막기 위해 사행원의 이단요설, 방서 수입을 금했다.
진산사건은 양반이 제사를 폐한 사건으로 큰 충격을 주었고, 남인 역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이는 일부 넘인 세력이 좌천되는 정도로 끝나기는 했지만, 많은 양반층이 서교 신앙에서 멀어지면서 평민층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는 경주 김씨 세력과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 세력을 정치적으로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를 빌미로 대다수의 남인 인사를 숙청하였는데, 정순왕후는 언문 교지를 통해 ( 『박위편』 참조) 정조의 서교에 대한 교화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46쪽) 19세기에 이르면 정하상 등의 요청으로 북경교구에서 조선교구가 분리되어 프랑스 건교사들이 입국하였다. 그러나 이는 기해박해로 다시 한 번 위기에 직면학, 김대건 역시 병오교난(1846)으로 인하여 순교하였다. 이어진 병인박해 등으로 서양 제국주의와의 충돌 역시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도 19세기에는 아편전쟁의 결과 등을 토ㅇ해 서양에 대한 두려움과 관심이 증대되었으며, 청국에서 저술된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서학서와 연행사의 보고 등을 통해 서양과 서학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고, 이 과정에서 박규수, 이규경, 최한기 등의 인물은 서기의 적극적 도입을 주장했다.
결국 저자는 이러한 서학 도입 양상이 도학적 관점에서 소중화주의를 강화시키고, 위정척사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존심(存心)과 수양을 중시하는 도학적 경세관의 강화로 이어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실학파의 서학수용은 탈도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홍대용으로 대표되는 북학파의 중국 중심 세계관 탈피, 실학파의 실학적 경세관 등을 거쳐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고 정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해당 논문은 조선의 서학수용사를 정치적 관점에서 당시까지의 연구를 정리했다는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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