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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과 서점 마리서사의 주인이었던 박인환
김수영 시인은 『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등의 작품을 통해,
『껍데기는 가라』의 신동엽 시인과 함께 대표적인 참여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참여와 정치라는 말에 그의 세계를 가두기엔
인간으로나 시인으로나 김수영은 한없이 소소한 동시에 너무나 방대한 사람이었다.
김수영의 시어 중에 대표적으로 꼽는 게 몇 가지 있는데,
혁명, 실존, 설움, 생활, 사랑, 소시민 등이 그것이다.
혁명이란 단어를 제외하곤 대체로 참여정치와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심지어 김수영이 말하는 혁명이란 흔히 말하는 국가를 무너뜨리는 혁명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물론 김수영은 온몸의 시학을 내세우며,
끊임없이 말을 되뇌어 현실을 바꿔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 시여, 침을 뱉어라 中)
심지어 그는, 지금 보아도 통찰력 있어보이는 여러 주장을 펼쳤는데,
낡고 타성적인 문단의 신인 추천제를 꼬집은 『문단추천제 폐지론』이나
(이 말은 바꾸어 말하자면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시다웁지도 않은 시를 쓴답시고 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는 말이다.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에 가장 순수하고 진지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문인들의 사회에서까지 신용할 수 없는 제품을 무작정 대량생산하는 제도가 있으니 이건 정말 어지럽고 불쾌해서 못살겠다는 말이다. - 문단추천제 폐지론 中)
『시의 뉴 프런티어』라는 글에서는
(본래 글의 요점은 아니지만)말미에 이북 시인들의 시를 읽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김일성 만세'라는 미발표 시에서 보여지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다.)
이렇듯 김수영 시인은 실제로 정치와 현실에 관한 글들을 발표하며 온몸의 시학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김수영은 자신이 말하는 일명 '생활'에 대한 산문도 다수 발표하였다.
부업으로 양계를 하고, 구공탄 냄새를 맡지 못해 위험한 상황에 놓이기도 하며,
박인환의 서점, '마리서사'에서 다른 시인들과 노닥이고, 다소 강박적으로 외국 잡지를 모으고,
비 오는 날 쏟아지는 물줄기를 사자에 비유해보며 바쁨과 한가함에 대해 고민하는,
말 그대로 '생활'을 하는 그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곳에 담긴 이야기들은 얕은 동시에 얕지 않은 사유를 담고 있으며,
마리서사처럼 가까운 동시에 엘리엇처럼 멀기도 하다.
아쉽게도 그의 복잡한 세계를 한 문장으로 풀어내기란 필자로썬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그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뚜렷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은 표현할 수 있겠다.
그의 이야기는 특히 60년대 시단을 표현한 부분이 많아,
평소 국문학사를 좋아하던 독붕이라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마리서사와 그 주변인, 그리고 그들에 대한 김수영의 친분과 진심이 어우러진 속된 단평은
그야말로 그 시절 서울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소다.
그 외에도 기존에 번역된 외국 작품들은 죄다 엉망이라느니,
(앞서 언급했던 것도 그렇고) 요즘 시단은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독자(시를 좀 읽는다는, 대학 교수와 평론가를 모두 포함하여)란 작자들은
은근하게 김수영 본인도 모르는 시에 대해서 정답을 제시하는 듯 너스레 떤다느니,
구체적인 묘사된 당시 시단의 상황과, 그의 날카로운 의견들 역시 그가 쓴 산문의 매력이다.
다만 필자가 가장 매력을 느낀 것은 이따금 튀어나오는 김수영의 관망자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평소 김수영은 '생활'에 대해 다소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서 부정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생활' 속에서 또렷이 모든 동세들을 관망하는,
세계의 관찰자와도 같은 그의 모습에서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동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여튼, 김수영 시인의 세계는 단순히 참여와 정치로만 표현하기엔 너무나 다원적이다.
어떤 인물이든 한 수식어에 갇혀있는 건 아깝다는 게 필자 개인의 생각이다.
이것 또한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필자는 작가의 에세이를 읽는 걸 좋아한다.
『노르웨이의 숲』은 읽다 말았어도 무라카미 라디오는 꼬박꼬박 읽을 정도였으니,
무튼.
오늘도 시인은 많고, 시도 많고, 말도 많고,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또 누군가를 알거나 모르고 있다.
음, 마지막으로 김수영 시인의 일기 일부를 첨부하며 글을 마친다.
감사합니다.
암만 보고 있어도 이 평범한 풍경이 싫지가 않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식(植)의 생각도 저 풍경들과 같이 특색이 없으며 구스한 것뿐이다.
'어디 시골 학교에 교원 노릇이나 하러 갈까?'
이렇게 자문하여 보았으나 이런 장래에의 계획도 으레 계속되지 못한다.
열흘이고 한 달이고 이렇게 한정 없이 앉아서 저 풍경 속에 빨려 들어가 보고 싶은 의욕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사람이라든가, 그들의 움직임이라든가, 그들의 주고받는 말 같은 것도 그러하였다.
식은 그냥 그것을 보고 듣고만 있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그 안에서 무한한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 같다고 그는 느끼는 것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1965.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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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는 좀 투박한 비유이지만 오랜 동안을 두고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학잡지의 신인들에 대한 추천제도만 하더라도 이제는 좀 차분하게 가라앉아서 추천하는 사람이나 추천을 받는 사람이나 다 같이 근본적인 반성을 해볼 시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 이 말은 바꾸어 말하자면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시다웁지도 않은 시를 쓴답시고 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는 말이다.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에 가장 순수하고 진지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문인들의 사회에서까지 신용할 수 없는 제품을 무작정 대량생산하는 제도가 있으니 이건 정말 어지럽고 불쾌해서 못살겠다는 말이다.
개나소나 아니고 어중이떠중이였네; 무튼 이 글의 요지는 낡고 양산적인 문단추천제(신춘문예와 신인문학상을 포함해서)가 개성적인 시인들을 발굴하지 못하고 그저 물량공세 전략에 그치고 있다는 거. 김수영은 본문에서 이걸 돈 때문도 아니고 권위 때문도 아니고 그냥 타성(매너리즘/악습)이라고 말함. 이를 타파하는 게 김수영의 철학이랑 관련되어 있고, 결론은 문단추천제를 반대하는 게 마음 ㅇㅇ. 본문도 수정하겠음 ㄳㄳ.
잘 읽었습니다. 김수영이라는 사람을 몰라서 본문은 잘 모르겠지만, 밑에 달아놓으신 문장이 제 마음을 흔드네요 언젠가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