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그 말.


나같은 병신은 그 MS 125를 예전에 찾아봤다.


그 노트 앞뒤 내용은 이렇다.









"푹 쉬는 거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달리기로 찾아봐라!"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걸을 수도 없다면?

"당신이 무너질 때까지 무너지는 것에 대해 말하지 말아라."

자전거를 타는 사람처럼, 넘어지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페달을 밟고 움직여야 한다.


[귀여운 것은 아름다울 수 없다.]


병실에서 내일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 정말 무서운 곳이다.

남자들 외에도 아픈 아이들이 몇 명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끊임없이 신음을 내고 있다.

바람이 부는데 불편하고 또 불편하다. 간호사들도 불편해 한다.


나의 불행은 너무 복잡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단어를 찾자면 그것은 외로움일 것이다.


일주일 전에 긴급 메시지를 요청했지만 열흘 동안 K로부터 소식을 듣지 못했다.

아마 나와 헤어진 것 같다. 너무나 슬프다!

난 며칠 후에 회복을 위해 케임브리지로 가야 한다!

나는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나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내 상황에 처한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다.

무엇인가를 선택하거나, 아예 포기하거나. 남은 시간을 불행하게 보내기 위해 남은 선택지다.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그저 고난에 찬 글들을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실 언어의 이해이기보다, 언어가 나오게 된 "삶의 형태"의 변화를 꿈꾸고 있다.

관련 문구. "한 시대의 질병은 인간들의 삶의 방식에서의 변화에 의해 치유된다. 그리고 철학적 문제들이란 질병은 한 개인에 의해 발명된 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변화된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바라는 삶의 형태의 변화의 첫번째 방법은 "태도 변경"이다.

“당신이 삶에서 발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그 문제성 있는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그런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삶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당신의 삶이 삶의 형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만 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꿔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그 형태에 맞게 되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라진다.”


이것은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유일한 방법으로 주장했던 방법이고,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도 99%의 경우 이 방법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모범적인 언어에서 나오는 "영원의 관점" - "일목요연한 묘사" - "조망가능성"을 포착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저 삶을 문제가 있으면 삶을 바꾸라는 문구를 보자. 이게 정말 제대로 된 해결 방법인지 생각해보자.

혼자서 어떻게 해결하는가? 사회가 우리를 끝으로 몰아세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이 있었다. "각성한 사람들이 모여서 세계를 변화시켜 직접적인 삶의 변화를 꿈꾸는 방법"인데, 비트겐슈타인은 이게 거의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라고 보았다. 비관으로 가득 찬 슈펭글러의 철학에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을 본받아 이 시대는 절대 그 방향으로 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고통받는 이 시대의 사람들도 그 고통에 대해 감내할 수는 있어도 각성하기엔 너무 힘들다고 봤다.



비트겐슈타인이 미학에서 한 두 문구가 있다.



하나는 전쟁일기(초기 비트겐슈타인)에서 나오는 문구.

"예술 작품은 영원의 관점에서 본 대상이다. 그리고 좋은 삶은 영원의 관점에서 본 세계이다. 이것이 예술과 윤리의 연관이다."

여기서 영원의 관점은 초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최종 목표라고도 볼 수 있다.

영원의 관점의 정의는 정보가 빈약해 찾기 힘들지만, 굳이 넣자면 "세계 전체를 한계 지어진 것으로 관조할 수 있어서, 오직 질문이 던져질 수 있는 것만 답변하고, 다른 답해질 수 없는 삶의 모든 중요한 질문에 침묵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세상 전체를 보아야 하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생각하기도 힘들고, 어떻게 말해 형이상학적인 일이다.

후기에서 이 용어는 "일목요연한 묘사" - "조망가능성"으로 대체되었지만, 역시 그 어려움은 달라지는 게 없어, 수학적 증명마냥 아주 엄밀하고 고난스러운 것이 된다.

예술과 아름다움은 그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말하지만 "태도 변경"이다. 미학의 목적은 영원의 관점을 이루기 위해 자기 태도를 변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초기 비트겐슈타인에 거의 가까운 1931년의 "문화와 가치"에서의 문구가 있다.

"오늘날 철학을 가르치는 자가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까닭은 그것이 그 사람에게 맛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미각을 바꿔놓기 위해서이다."

좀 더 다르게 바꿔보자. ‘오늘날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자가 다른 사람에게 예술을 주는 까닭은 그것이 예술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예술적 감각을 바꿔놓기 위해서이다.’

똑같이, "태도 변경"만을 염두해 두고 있다.






이제 경박하지만 주석을 달아보고자 한다.



[

"푹 쉬는 거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달리기로 찾아봐라!"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걸을 수도 없다면?

"당신이 무너질 때까지 무너지는 것에 대해 말하지 말아라."

자전거를 타는 사람처럼, 넘어지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페달을 밟고 움직여야 한다.

]


[

무엇인가를 선택하거나, 아예 포기하거나. 남은 시간을 불행하게 보내기 위해 남은 선택지다.

]


"당신이 무너질 때까지 무너지는 것에 대해 말하지 말아라."

"무엇인가를 선택하거나, 아예 포기하거나. 남은 시간을 불행하게 보내기 위해 남은 선택지다."

로 대표되는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삶의 극소를 향해가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태도 변경" 뿐이다.


귀여움과 예쁨은 세계 안에서의 무엇인가의 의미를 뜻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아름다움은 세계의 한계의 의미, 세계 자체의 의미, 삶의 의미를 뜻한다.



[

병실에서 내일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 정말 무서운 곳이다.

남자들 외에도 아픈 아이들이 몇 명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끊임없이 신음을 내고 있다.

바람이 부는데 불편하고 또 불편하다. 간호사들도 불편해 한다.


나의 불행은 너무 복잡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단어를 찾자면 그것은 외로움일 것이다.

]


귀여움과 예쁨은 아직 성숙하지 못해 세상에 대해 탐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에 반해, 아름다움은 세계에 대한 탐구이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소의 상황, 끝임없는 신음과 추운 바람, 삶의 단어를 찾으려는 불행을 통해 세상 앞에 부딪히는 것이다. 이 탐구는 세상에 대해 외치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같은 질문과 같이 분류가 되어 있다. 여기에는 경박함의 절벽이 산재해 있다. 좋은 예술 작품은 이 곳에서 자기 자신을 버텼던 것이다.



[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


이 세상에 귀여운 것이 무엇이고, 예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그저 그 자리에서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는 불행이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는 것만큼이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는 대답하지도 않고, 설명하지도 않고, 최대한 보여주고 우회해가며 다른 사람에게 예술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언젠가 나처럼 초점이 바뀌기를 바라며, 그의 표정이 언제 바뀔지 계속 지켜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