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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p


일단 이 책은 1945년, 저널 <Les Temps modernes(현대지)>의 창간사에서

사르트르가 정치적 참여를 이념으로 내건 뒤,

그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함

사르트르는 그 반발의 목소리로부터 처음으로 돌아가

문학이 무엇인지 되짚기 위해 글을 썼음을 밝히고 있음


글의 동기가 이렇기에,

이 글은 전체적으로 사르트르의 문학론을 내보이는 동시에,

결과적으론 문학의 참여에 관한 논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음


1. 쓴다는 건 무엇인가


사르트르는 일단 운문과 산문을 나누고 있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운문은 언어를 활용했으나 사실은 회화, 음악, 조각에 더 가까운 것으로,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어떠한 의미를 생성한다기 보다는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기 때문


즉 시인이 단어의 연결을 통해서 생성하는 건 뭔가 화용론적이고 담화적인 의미의 언어가 아니라

마치 화가가 현실의 물체를 그려놓은 것을 우리가 실제라고 인식하는 것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투과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

그래서 시어는 단순히 화용론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고

시인이 부여한 세계의 관계성에 따라서 이미지를 받음

그에 따라 시어가 투사하는 실체는 굉장히 다채롭게 변화하게 됨


그래서 사르트르의 말로는 시적 언어를 통해 참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함

왜냐하면 시인의 언어는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

단지 시어는 보여지고, 사물화될 뿐이며, 의미를 담을 수가 없음

그래서 사르트르의 견해로는 시인의 참여는 불가능함


그렇다면 산문은?

사르트르는 산문은 본질적으로 실용적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명환 번역가님께서 덧붙이시길, 이 표현은 구별을 위해 과장된 표현이라고 함

번역가님께선 사르트르가 나중에 산문 또한 기호에 한정되지 않고,

말의 물질성을 중시하도록 독자를 환기시킨다고 하심)


산문의 기술의 행사는 담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

앞서 말했듯 산문은 의미를 담을 수 있음

이 책에서 여러 번 비유하듯, 사르트르는 언어를 일종의 감각기관의 연장으로 보았음

그래서 언어는 자연스레 한 가지 의미를 지각하게 만들고, 한 가지 의미를 지향하게 만듦

이에 따르면 결국 모든 언어는 어떠한 계기를 싣고 발화되는 것임

그래서 시인과 다르게 산문가에겐 이렇게 물을 수 있음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글을 쓰는가? 당신은 어떤 기도(企圖, 어떤 일을 이루려고 꾀하는 것)로 나선 것인가? 그리고 그 기도는 어떤 이유에서 글쓰기를 수단으로 하는 것인가?」


이렇듯 산문가 같은 경우에는 무언가를 남들에게 피력하겠다는 결의를 글쓰기의 동기에 가지고 있음. 그래서 읽는 사람들은「당신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 남에게 전달할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란 질문을 던지게 됨.


또한 언어는 실체에 대한 명시성을 지니고 있어서, 누군가 어떠한 것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이 드러나게 됨.

그러면 그것의 주체는 그것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음.

그리고 이름 붙인 사람은 그걸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행하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 자신을 보는 동시에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을 알 수 있음.

즉, 무언가 이름을 붙인 것은 객관성을 띠게 되고, 새로운 규모로 발전하고, 반성의 대상이 됨.

이렇게 되면 이름 붙여진 것은 일전의 상태를 유지하거나, 또는 상태를 바꾸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됨.

결론적으로 말을 한다는 건 상황을 바꾸려고 꾀함으로써 상황을 드러내는 것임.



힘드니까 나머지는 또 언젠가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