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송된 택배상자를 들고 헐레벌떡 들어와 박스와 비닐을 거칠게 잡아뜯는다. 오동통하니 탐스러운 책등을 가볍게 쥐고 기분 좋은 묵직함을 만끽한다. 부드럽고 단단한 표지를 손으로 한번 쓸고 양손으로 책 모서리를 잡고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벌린다. 드러난 뽀얀 속살 속 알알이 박힌 활자가 나를 반긴다. 손바닥으로 지그시 정중앙을 꾹 눌러 주인의 표식을 남긴다. 책을 펼쳤던 자국을 내는 것은 꽤 즐겁다. 이제 넌 중고다. 넌 내 거야. 버릴지언정 팔진 않는다.
나의 독서 철칙이 있다.
첫째,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독서는 하지 말자. 내 분수에 맞는 책을 찾자.
둘째, 독서는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없는 책은 읽지 말자.
그런데도 나에게 독서는 꽤 고상한 섹스다.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내음에 취하고, 온몸으로 즐기는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순결한 육체로
고결한 쾌락을 탐한다.
새 책을 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행위는 페이지 사이로 얼굴을 처박고 은은한 책 내음을 마음껏 들이키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새 책을 샀을 때만의 특권이다. 책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 빛이 바래듯이, 펼치고 넘길수록 처음의 향기 또한 종이를 떠나버린다. 이것이 못내 아쉬워 그 냄새를 코에다 새기려는 것처럼 연신 들이쉬기를 반복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노라니 옆에서 지켜보는 동생의 표정이 여간 언짢은 게 아니다. 그 짓 좀 그만 할 수 없냐고 일갈한다. 눈을 흡뜨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불쾌하단 표정으로 한번 째려보고는, 소심하게 동생의 코 앞에 책을 팔락거리는 복수를 한다.
나라별로 책냄새, 질감이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가? 영미권 특유의 까끌거리는 싸구려 종이 사이론 먼지 섞인 구수한 신문냄새가 나고, 빤빤한 일러스트집 종이에서는 알싸한 문제집 냄새가 나며, 심지어 약한 쇠 냄새, 달짝지근한 냄새, 산미 있는 냄새가 은은하게 느껴지는 책도 있다. 질감은 또 어떠한가? 개인적으로 난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일본 문고판을 좋아한다. 한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고, 따뜻한 색감의 반들반들하고 부드러운 종이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의 그 느낌이 좋다. 중국 책은 대체로 큼직큼직하게 나오는데, 좀 뻣뻣한 감이 있어 길들이기 조금 힘들다. 영미책은 페이퍼백 같은 경우에 부담없이 볼 수 있으나 간혹 특유의 질 낮은 종이에 손의 땀이라도 배길 때 기분이 급속도로 더러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어 퍽 조심스럽다. 그에 비하면 한국책이 가장 안정적이고 품질이 좋다. 가장 재미있는 종이는 사전류다. 그 야들야들한 종이에 가만히 손가락을 대고(이건 한 손가락만으로도 가능하다) 새침하게 종이를 튕겨내듯 밀면 그 쫀득한 느낌과 챠락, 챠락, 챱, 챱 소리가 아주 기가 막힌다. 전자책으로는 할 수 없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유희다.
손을 뻗어 종이 표면을 어루만진다. 종이를 촤르륵 넘겼다가, 힘을 주어 한 장씩 틱틱 넘기다가, 희롱하는 듯, 장난치는 듯, 구슬리는 듯, 어루만지고 쓸어내리기를 반복하며 길들인다. 맹인이 손으로 책을 읽듯이 나 역시 독서에 손을 아낌없이 사용한다. 자칫 종이를 구겨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밀지만 애써 참고 새하얀 종이 위의 활자를 눈으로 가만히 응시한다. 활자를 거기서 뜯어내버리고 싶다. 살살 손톱으로 긁어내서 꽉 쥐고 온몸으로 느끼고 흡수하고 싶다.
그럼 준비가 다 된 것이다. 나는 숨을 들이키고 나의 시선은 종이 위 새겨진 잉크의 흔적을 헤집는다.
최후의 순간, 활자가 나를 압도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단지 얽힌 선 덩어리에 불과한 문자의 집합체가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간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관객이다. 소설의 경우, 작가의 합법적인 사기 진술을 보고 듣고 느끼고 그 속에 나 역시 있다. 내 앞에는 등장인물이 갑작스레 나타나 난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자기 할 일을 한다. 난 조용히 인물들을 따라다니지만 그들을 만지지는 못한다. 난 한발짝 물러나서 그들이 웃고, 울고, 분노하고, 좌절하며, 사랑하고 사는 것과 죽는 것을 지켜본다. 나의 감정은 고양되고, 필력이 개쩌는 문장을 만날 때면 벅차오르는 감정에 책을 그만 덮고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방 안을 서성이고, 노트에 꾹꾹 눌러 쓰고, 하루종일 곱씹는다. 빠른 절정보다는 은은한 전희를 즐기는 마음으로 오늘 이 책은 여기까지 읽기로 한다. 뒷내용이 궁금하지만 내일을 위해서.
아쉬운 마음으로 쩝쩝거리는데 나의 시선은 예전에 홀린 듯 사두었던 개-깐지나는 표지의 셜록 홈즈 원서로 향했다. 무심코 책을 펼쳐 아무 페이지나 훑는다. 아뿔싸... 셜록 홈즈가 피곤한 왓슨을 눕혀놓고 재워준답시고 바이올린을 낑깽대고 있었다. 이 새끼는 불쌍한 왓슨이 몇 번이나 뒤질락말락 하는데도 그앞에서 마이 디어 왓쓴- 어쩌구 시시덕거리며 쪼개는 행태가 볼수록 괘씸하기 그지없다. 아직 대가리가 덜 깨진 건지 홈즈가 몇 마디 털어주면 ‘역시 홈즈... 자네는 천재...! 대단해...! 어디까지고 같이 가 주지....!’ 이러는 왓슨을 보아하니 홈즈가 아주 사람 한명 기똥차게 조련한 듯 싶다.
몇 장밖에 안 읽으니 감질나는 게 좀이 쑤신다. 그럴 때는 누워서 눈을 감고 읽은 책들을 떠올린다. 이것도 읽다가 저것도 읽다가 잡다하게 읽다보니 머릿속은 헤세 니체 톨스토이가 아가리 배틀을 하고 멋진 신세계 사람들이 미개하기 짝이없는 1984 세게관으로 난입해 빅브라더 작당들을 뚜들겨 패고 소마로 타락시키는 등 난장판이지만 이게 은근 재밌다.
내일 읽을 부분은 재밌는 파트일 것이다. 재밌는 파트여야만 한다. 그래야 안 먹고 남겨둔 보람이 있으니까. 벌써 군침이 절로 돈다. 내일은 다 먹을 거다. 남김없이 쪽쪽 빨아서... 조급해하지말고 조금씩 천천히 야금야금.... 하아..... 읏.....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아... 아..... 앗훙!!!!!!!!!!!!!!!!!!!!!!!!!!!!!!!!!!!!!!!!!!!!!!!!!!!!!!!!!!!!!!!!!!!!!!!!!!!!!!!!!!!!!!!!!!!!!!!!!!!!!!!!!!!!!!!!!!!!!!!!!!!!!!!!!!!!!!!!!!!!!!!!!!!!!!!!!!!!!!!!!!!!!!!!!!!!!!!!!!!!!!!!!!!!!!!!!!!!!!!!!!!!!!!!!!!!!!!!!!!!!!!!!!!!!!!!!!!!!!!!!!!!!!!!!!!!!!!!!!!!!!!!!!!!!!!!!!!!!!!!!!!!!!!!!!!!!!!!!!!!!!!!!!!!!!!!!!!!!!!!!!!!!!!!!!!!!!!!!!!!!!!!!!!!!!!!!!!!!!!!!!!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 움베르토 에코 -
마지막 문구는 켐펜의 토마스가 한 말이 원조. 에코는 그걸 인용한 것. 그건 그렇고 너 글빨 쥑이네.... - dc App
(박수)
멋진 신세계가 1984 쳐들어가는 거 개웃기네ㅋㅋ
실베추
필자는 아다인거 같습니다
이건 독서가 아니라 시선강간이네요
이샛기 실베 보내보자
실베추
개공감 와 미친 와.너무야해 - dc App
심장이뛰고 흥분된다 너 진짜 너무 야하다 두번읽었다 명문이다 눈물난다 황홀하다 으앙 - dc App
잘 가다가 갑자기 왜 가버리는데ㅋㅋㅋ
아니 씨발ㅋㅋ
글 잘쓰노ㅋㅋㅋ
실베고로시 ㅋㅋㅋㅋ
이게 야스지
현역 작가 아님? 너무잘쓰는데 ㅋㅋ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