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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추천한다.
불교라는 거대한 세계에 들어서는 입문(入門)서로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성제, 팔정도, 삼법인 등 이론적인 부분은 굳이 길게 다루지 않겠다.
나는 불교의 본질 챕터가 좋았다. 내가 미약하게나마 불교와 부처에 대해 가진 관점과 거의 비슷했다.
작가는 부처를 리얼리스트, 휴머니스트, 좋은 벗, 좋은 안내자로 보고 있다.
부처는 저러한 사람이었고 스스로도 저러하게 여겼을 것이다.
역사 속의 실제 부처는 과대포장된 초인이나 신적인 존재가 아니었을테니까.
- "비구들이여, 번뇌를 멸하는 도리에 대해 내가 설하는 것은 그것이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까닭이니라.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은 설하지 않노라."
<여시어경 102절>
- "나는 교단의 지도자라고도, 또 교단이 나에게 의지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교단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되겠느냐?"
<장부경전 16 대열반경>
- "나는 그 길을 일러 주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제자 중에는 그 경지에 이르는 이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이도 있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일 따름이다."
뭔가 공자랑 스탠스가 비슷하다. 자신의 한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은 담담하게 선을 긋는다.
- "바카리여, 이 나의 늙은 몸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너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법을 본다고."
<상응부경전 22:87 바카리>
부처의 인간적인 면모다. 그는 불로불사의 존재가 아니다. 그는 그저 사문(沙門)들 사이의 선각자이자 친절한 벗이었다.
- "좋은 벗을 갖고 좋은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도(道)의 전부이다."
내게는 사성제나 팔정도 만큼 중요해 보이는 구절이다.
- "그러므로 아난다여, 너희는 이에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하여 남을 의지처로 삼지 말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남을 의지처로 삼지 말고 주(住)하거라."
보통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으로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나는 어쨌거나 불교도가 아니다. 종교인이 아닌 나는 그저 앎에 대한 욕구가 있고 이리저리 헤매는 걸 좋아하는 놈이다.
그렇지만 나홀로 가다가 막막할 때 도움이 됐던 구절이다.
"불교는 붓다에서 끝나지 않는다"
마스타니 후미오는 불교의 역사를 다루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때 초기불교만이 변질되지 않은 진리를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교의 이런저런 부분을 쑤시다보니 이제는 '대승(大乘)'에 이르러 불교가 더 넓어지고 더 깊어졌다고 생각한다.
붓다는 불교의 도착점이 아닌 불교의 시작점인 것이다.
- "벗 아난다여, 세존의 첫 설법은 어디서 이루어졌소?"
"벗 마하 카사파여, 나는 이렇게 들었소. 어느 때 붓다께서는, 바라나시의 미가다야에 계셨소……"
그것은 엄숙하고도 감명 깊은 정경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붓다의 첫 설법의 경위와 내용이 외어질 때는 자리를 같이한 장로 비구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엎드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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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떠나고 첫 결집에서 벌어진 일이다.
나는 불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스승이자 벗이었던 이를 기리고 그를 기억하기 위해 수백 수천의 사람이 모인다.
적막 속에 고인이 생전에 남긴 말이 전해지기 시작한다.
사문들은 속세의 감정을 초월해야 하겠지만 모두가 사랑, 슬픔, 그리움이 뒤섞인 눈물을 흘리며 엎드린다.
이런 순간에 종교니, 철학이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 부분을 접할 때마다 코끝이 찡해진다.
부처의 모든 설법보다 이 장면이 귀해 보였다면 오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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