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나쁜 글, 이상한 글
올 여름
난 시간에서 풀려났다.
트라팔마도어인에게 납치를 당했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날 묶어두었는데 당직 근무를 서던 참이어서 크게 반항하지 않았다. 탈영으로 처리되지 않을까 걱정은 했던 것 같다.
트라팔마도어 사람들은 날 어느 방에 데려다 줬다.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이 미리 와있었다. 커다란 서재에 침대와 소파가 인원수만큼 놓였다. 그 밖에 필요한 게 있냐고 트라팔마도어인들이 물었다. 다 좋은데 날 여기 왜 데려왔는지 알려줘요. 외계인에 대해 아는 거라곤 ‘노잉’이나 ‘스카이라인’, ‘더 씽’, ‘에일리언’ 따위 허접한 SF영화 뿐이었고, 그래서 대단히 비장한 목소리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잡아먹히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거든.
돌아온 대답은 황당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끼리 글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토론해줬으면 한댔나.
인류의 생식이나 섭식, 배설 활동은 이제 고루해요. 트라팔마도어인은 말했다. 예전에는 그냥 가둬두고 보는 것만도 재밌었는데, 다른 새로운 걸 보고 싶어서요. 우릴 지켜보는 트라팔마도어인 두어 명이 돔형 방밖에 서 있었다.
트라팔마도어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설이 없다. 이들은 시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드라마’나 ‘플롯’ 따위가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인류의 ‘글’이란 것에 관심이 생겼다나 뭐라나.
하지만 ‘글’은 지루한 활동인데요. 내가 물었다. 인류 사이에서도 마이너 해요.
괜찮아요. 트라팔마도어인은 웃었다. 이거 보러 오는 트라팔마도어인들도 힙스터거든요.
글의 구성요소
트라팔마도어인은 나갔다. 그럼 이제... 토론을 시작하려 했지만, 아뿔사,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개중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국에서 온 할아버지였는데, 노발대발 내게 화를 냈다. 엄마가 보고 싶다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나서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 심지어는 치매 환자도 한 명 있었는데(영국 노인), 대체가 토론을 할 환경이 아니었지.
그래서 그냥 종이랑 연필을 갖다 달랬다. 뭐, 그런 거지.
‘모든 글은 크게 세 부분, 작게 아홉 부분으로 구성된다: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첫 문장을 썼다. 아래에 표를 그렸다.
무엇을(메시지) | 무엇을(주제) |
어디에(시의성) | |
어떻게(스탠스) | |
어디에(서사) | 무엇을(스토리) |
어디에(구성) | |
어떻게(서사적 기법) | |
어떻게(문장) | 무엇을(문장의 목적) |
어디에(문장 배치) | |
어떻게(수사법) |
‘그럼 이 도식으로 글 몇 개를 살펴보자.’ 그런 문장을 썼지만 그곳에 한국어로 된 읽을거리는 전무했다. 하는 수 없이 시간을 왔다갔다하면서 읽었던 글들을 다시 읽어야만했다.
잘 쓴 글과 나쁜 글
결국 잘 쓴 글이란 위 아홉가지 요소를 얼마나 조화롭게, 또 치밀하게 구성한 글이라고 생각했다.
<증언의 문학화: 「제 5도살장」과 「아우스터리츠」 겹쳐읽기>는 내게도 관심있던 주제 - “문학과 현실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글이었기에 관심이 동했었다. 간단하게 글의 개요를 적어두곤 아래에 짤막하게 평가를 적어두었다.
‘... <증언의 문학화>는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글이다. 물론 한계도 몇 가지 보인다. 글의 세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메시지 :
- (시의성) 문학에 관심있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증언 문학이란 어때야 하는가’를 말하고자 한다는 점이 좋음. 특히 증언 문학, 소수자 문학이 트렌드를 탄 지금 말해져야만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
- (내용) 그러나 정작 ‘증언으로 문학하다’ 속에 담긴 구체적인 메시지는 고지식.
“왜곡을 걷어내지 않고 있는 그 자체로 묘사하는 것”이 글의 핵심이라면, 증언과 재현의 문제에 관해 발터 벤야민이 남겼던 통찰 : “가장 훌륭한 책은 인용문으로만 이루어진 책이다”라는 문장에서 어떤 지점이 발전한 것인가?
다르지 않다면 벤야민의 주장이 나온지 반세기가 넘은 이 시점에도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곡 없는 증언이란 기실 “김봉곤의 오토픽션”이 지향하는 바 자체가 아닌가?
내용의 깊이감이 아쉬웠음.
- (스탠스) ‘증언으로 문학하기’라는 메시지로 한국 문학 전반을 비평하는 스탠스를 취했으나, 커터칼로 소 잡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음. 페미니즘, 퀴어는 주제에 가깝고 증언 문학, 오토 픽션은 기법에 가까우니 – 사실 비평의 스탠스를 취하려 했다면 ‘한국의 오토픽션’이라는 특정 주제를 좀더 파고들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서사 :
-(플롯) 「아우스터리츠」와 「제 5도살장」을 묶는 시도는 좋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시간 감각에서 증언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하는 것도. 하지만 두 다른 작품 사이 대비가 뚜렷하지 않음. 아우스터리츠에 비해 제 5도살장은 훨씬 유머러스한데, 이 둘이 취하는 뉘앙스의 차이도 설명해줬다면 좋지 않았을가.
-(구성) ‘왜곡 없는 묘사’를 말하기 위한 감상이라면 감상 자체도 ‘왜곡 없는 방식’으로 구성하는 편이 적합하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인용문으로 감상 작성하기.
(후략)’
써놓고 보니 대단히 오만해 보였고, 뒷부분을 찢어내야만 했다. 종이를 찢자 영국 노인이 비명을 질렀다. Shut up! 소리치곤 이어서 글을 썼다.
‘<문학은 폭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는 같은 주제를 좀 더 잘난 척하며 쓴 글이다. 두 글은 비스무리한 주제에 스탠스를 가지고 글을 썼지만, 전혀 다른 스탠스를 취한다. 전자는 감상과 종합에 집중하는 반면, 후자는 분석과 비교에 집중한다. 그 탓에 <문학은 폭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는 장황하고 지나치게 자세한 내용에 비해 결론이 빈약하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겠다. 반면 <증언의 문학화>는 분석은 비교적 가볍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다. 감상문이란 자고로 느낀 점, 말하려고 하는 점이 명확해야 하지 않은가. '무엇을' 부분이 지나치게 빈약하여 감상문에 적합하지 않다.(후략)’
여기까지 쓰고 또 너무 신랄하게 비난한 것 같아 뒷부분을 찢어냈다. 트라팔마도어인들은 뭐가 재밌는지 내가 글을 쓰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상한 글
하지만 그렇게 정해진 항목대로 감상하는 거라면 왜 글을 읽어야하죠? 트라팔마도어인이 물었다. 그냥 기준대로 써진 요약본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난 대답할 수 없었다.
일전에 난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하다”를 읽고 이런 문장을 남겼다.
“텍스트 A를 다시 텍스트 A'으로, A'을 A''으로, A''을...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평론은 존재하지 않는 작품을 현시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기획해야만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한 글. 다른 글에 대한 평론이면서 픽션이고, 나아가 제 스스로에 대한 평론인, 자기 순환적인 글. <유목과 정주>와 <뻘글들>은 그런 글이다.
‘<유목과 정주>는 베케트와 쿳시, 매카시의 작품을 ‘유목’과 ‘정주’라는 키워드로 분석하는 글이다. ‘유목’과 ‘정주’는 지나치게 포괄적인 단어로 변해서 분석은 날카로움을 잃고 한없이 둔하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문학은 폭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와 마찬가지로 결론이 지나치게 빈약하다. 그래도 글 자체는 소설처럼 재밌게 읽힌다. 감상인데도 허구가 섞이는 지점이 고민해볼 법 하다.
(후략)’
<뻘글들>은 훨씬 미묘한 작품이었다. 읽는 동안 몇 번 전 문단으로 돌아가야했고, 무슨 내용인지 여러번 더듬어봐야했다.
‘(전략)
메세지 :
- (내용) ‘만능 열쇠로써 철학을 생각하길 경계해라.’라는 묵직한 메시지.
- (시의성) 문학-윤리가 중요해지는 이 시점에 필요한 담론이 아닐까? 물론 여기에 대한 비판으로 넘어가진 않는 게 아쉬움.
- (스탠스) 신형철을 필두로한 최근 한국 문학 비평가들이 철학 용어를 남용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듯한 도입이 재밌었음.
서사:
(구성) 1, 2, 3, 4, 5로 파편화 해 관련한 단상들을 짧게 적는 식. 전체적인 종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점이 오히려 메시지의 내용과 합일해 시너지를 줌.
(스토리) 비트겐슈타인, DFW, 최명훈, 신형철, 김현 등 안에 들어가는 삽화들이 모두 기존에 생각해보지 못한 신선함을 준다. 다만 하나에 깊게 파고 들어갔으면 보다 통일감있는 종합을 이뤄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서사적 기법) 감상문이지만 틀에 메이지 않고 소설과 철학서, 실제 철학자의 삶으로 자유롭게 오가는 점이 주목할만 함. 인물들의 대화, 소설 속 장면, 인용구들을 적절히 배치해 논픽션이면서 언뜻 픽션 같은 인상을 줌.
(후략)’
이런 유형의 글들은 재밌지만 평가하긴 어렵다. 이런 글들은 때때로 글의 3요소 -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를 갖추지 못한다. 내용은 틀에서 벗어나고, 원하는 종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글의 목적과 타겟 독자가 불명확하다. 독자는 이 글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안에서 풍기는 오묘함. 마구 뒤섞는 느낌. 평가를 어렵게 하는 요소들이 반대로 감상문의 한 축을 담당한다.
“글은 도식에서 벗어나려고 투쟁한다. 도식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한다.”
동감이다.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는 중요한 도식이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줘야 단순히 잘 쓴 글을 넘어 좋은 글이 될 수 있지 않을는지.
그래서 어떤 감상문이 좋은 건가요?
트라팔마도어인이 물었다. 난 대답을 고심해야했다. 근데 제가 뭐라고 좋고 나쁘고를 평가하죠? 내가 반문하자 트라팔마도어인은 독자 아닌가요? 물었고, 난 독자라고 누구나 글을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때 영국 노인이 고함을 질렀다. Mom! Where R U! 스페인어를 쓰는 아주머니 두 분이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아주머니 두 분은 나지막히 얘기하다가 외계인에게 납치당한 사람답지 않게 당찬 목소리로 웃어제꼈다. 그래, 사실 글이란 별 게 아니다. 결국 누군가의 중얼거림이다. 글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들어주는 사람의 웃음인가보다고.
나는 더 쓸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곳에 며칠 더 있어야 했다. 며칠이 지나서 우린 꽤 친해졌다. 말이 안 통하니 몸짓, 발짓에 서툰 영어를 더해가며 대화를 나눴다. 호기심이 동한 트라팔마도어인이 통역을 해주겠다 나섰지만 거절했다. 번역은 없는 편이 나아요.
나오기 직전 난 써두었던 글을 모두 찢어버렸다. 트라팔마도어인들이 아까워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실 트라팔마도어인들에겐 찢어지지 않은 시점의 종이도 보인다나.
돌아왔을 땐 납치됐을 때와 같은 시간이었다. 당직 사관은 자고 있었다. 난 몰래 일어나서 창밖을 바라봤다. 둥근 비행 접시가 하늘로 올라갔다. 가볍게 경례 자세를 취했다.
마지막 문단에서 쌌다
재밌게 읽었고, 또 아프게 읽었습니다... <증언의 문학화>는 <제5도살장>과 <아우스터리츠>를 어떻게든 엮어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는데, <아우스터리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깊이 있는 분석으로 나아가기 어려웠음. 그리고 한국문학에 대한 비판은 준비과정 없이 되는대로 막 썼다는 느낌이 강하고...
어렴풋이 느끼던 부분을 명확하게 콕 집어줘서 재밌었음. 특히 평가 기준을 9개로 나누는 부분이 인상적인데 님이 직접 생각한거임?
예
앗
뻘글 저거는 김현의 일기 스타일을 따라해볼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나온 작품임
난 되게 재밌게 읽었음. 예전에 비트겐슈타인 해석 썼던 것도 재밌게 읽었었음.
와
약간 괴델 에셔 바흐 느낌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