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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감상문은 ‘전도서’의 역할을 한다. 감상문을 읽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 역시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이 피어난다면 기본적으로 좋은 감상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점이 그 글을 좋은 감상으로 만드는가 하는 물음에도 역시 같은 답을 내릴 수 있다. 감상문을 읽고 책을 따라 읽고 싶어지는 마음, 그 ‘전도력’이 좋은 감상문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들이 글을 쓸 때 유념하는 격언 중에 ‘의미보다 재미’라는 말이 있다. 제아무리 대단한 의미를 담은 글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을 읽는 근본적인 이유는 재미에 있다는 작가들의 표명이다. 재미가 없으면 글은 읽을 필요가 없다. 어떤 의미를 담은 글이든 재미가 없으면 마치 알코올에 불이 붙은 듯 글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에서 금세 휘발되어버린다.


일례로, 고상해 보이는 취미일수록 그에 부합하는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독서, 전시회 관람, 클래식 감상 등이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고상함’의 영역 안에 있는 취미들이다. 이런 취미를 오랫동안 향유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서점이나 미술관, 콘서트홀을 찾는 걸까. 삶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인생의 관점을 바꿔줄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그곳에 발을 들이는 걸까? 물론 미술품이나 음악을 감상하면 어떤 영감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목적으로 취미생활을 이어나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순간은 매우 드물게 찾아올뿐더러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아예 찾아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문화를 소비하는 행위 자체가 즐겁기 때문에 그것들을 자꾸 찾게 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을 즐기지 못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인사이트를 얻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작품을 봤는데 감흥이 없으면 왠지 나만 작품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것 같은 찝찝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전시회에 몇 번 기웃거리다가도 얼마 안 가서 흥미를 잃고는 발길을 끊는다.


영화를 볼 때와 같은 마음으로 미술품을 본다면 이러한 취미를 부담 없이 누리는 데 도움이 된다. 영화와 미술품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재미가 없으면 영화 값이 아깝다면서 자연스레 영화 탓을 한다. 미술관을 찾는 마음가짐도 이와 같아야 한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고 감흥이 없는 건 우리 잘못이 아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면 우리는 미술품이나 고전문학에 대한 이상한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영화에 각자의 취향이 있듯이 글에도 역시 각자의 취향이 있다. 본인이 인상 깊게 읽었다면 그게 바로 좋은 글이다. 따라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글만 따라 읽을 필요도 없고 남들이 별로라고 하는 글을 피할 필요도 없다. ‘성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100대 필독서’ 같은 말을 내가 믿지 않는 이유다. 이렇듯 좋은 감상문, 나쁜 감상문의 기준은 객관적이지 않다.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한때는 읽기만 해도 법적으로 처벌받는 금서였던 책이 나중에 필독서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결국 감상문을 포함한 모든 글의 가치 판단은 독자 스스로가 해야 한다.


예시가 길었다. 요지는 정말로 좋은 감상문이라면, 그냥 느껴진다는 것이다. 좋은 글을 읽으면 몰입과 통찰, 재미와 의미가 머릿속에서 한데 어우러져서 잘 읽었다는 인상만이 남는다. 따라서 좋은 감상문이란 객관적인 분석을 넘어서, 오히려 본인이 느낀 주관적인 감정을 담아 독자에게 그 감정을 전염시키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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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의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이 왜 좋은지


첨부한 감상문은 폴 에어디쉬의 전기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를 읽고 내가 직접 쓴 글이다. 나는 소위 ‘수포자’다. 심지어 내신과 수능에 수리 점수를 반영하지 않는 미대로 진학해서 더욱 본격적인 수포자로 자랄 수 있었다(2010년에 수능을 치렀는데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그런 내가 어쩌다 헝가리 출신 수학자의 전기를 읽고 감상문까지 쓰게 되었을까.


책의 저자 폴 호프만은 수학자 폴 에어디쉬가 이룬 탁월한 업적 외에도 그가 저지른 각종 기행들을 책에 담았다. 각성제(암페타민)를 복용하며 하루에 19시간씩 수학만을 생각했고, 수학만을 생각하느라 다른 상식들은 무능력에 가까워서 평생 구두 끈 묶는 법이나 잠겨 있는 창문을 여는 법을 몰랐고, 아이를 부를 때는 아이 대신 작은 수를 뜻하는 '엡실론(ε)'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피부가 민감하다는 이유로 몸에 닿는 옷은 오직 실크 재질만 입었다는 그의 일화는 나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고 몰입과 재미를 선사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나는 기꺼이 이 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도사가 되고 싶었다.


독갤에 올리기 전 블로그에 이 감상문을 처음 올렸을 때, 내 감상문을 읽은 누군가 또 다른 감상문을 올리고 댓글을 달아줘서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좋은 감상문은 또 하나의 독자를 낳는다. 감상문을 읽은 사람들의 책에 대한 취향이 조금이라도 더 풍부해진다면 감상문이 제 몫을 했다는 뜻이 될 것이고 글을 쓴 입장에서는 그게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감상문의 존재 이유이자 사람들이 감상문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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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무엇이 필요한지


감상문 역시 콘텐츠다. 단점을 보완하기보다는 장점을 더욱 부각시키는 게 좋은 콘텐츠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따라서 내 감상문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더 많은 재미’다. <우리 수학자 모두⋯>의 감상문을 쓸 당시에는 역량이 부족해서 폴 에어디쉬의 기이하고 흥미로운 인생을 글에 다 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전도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산점을 위한 병적증명서를 첨부하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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