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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대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대체 어떤 책이길래 출간된지 1년이 넘어가려는 이 시점에도 예약이 끊이지 않는지 궁금했기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온전하게 읽고 싶어 쏟아지는 후기글을 외면 해왔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상당히 복합적이었다.


책은 저자인 룰루 밀러가 자신의 인생의 방황과 진화론의 발전을 엮어 표현한, 일종의 에세이이다.

신의 메세지에서 자연의 메세지로, 그리고 결국 혼돈으로 빠져드는 진화라는 개념의 하강과 그 의미를 붙잡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들.

신의 말씀을 찾는 과학자 아가시와 그의 제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리고 조던은 몰랐을 그의 멘티 저자 룰루 밀러.


아가시에겐 지구 생명체의 경계선, 종에 신의 의도와 메세지가 담겨 있었다 생각했었다.

Scala Naturae, 즉 존재의 대사슬을 해독하여 신이 중요시하는 특질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그것이 과학이 해야하는 일이었다.

진화론이 종들 사이의 경계선을 지워버리고 그것이 시간에 따른 무작위한 힘의 작용임을 보여주었을 때, 아가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제자 조던은 스승과 달리 진화론을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인생의 의미까지 버릴 순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과학적 추구의 고귀함을 지키기 위해

신을 대체할만한 것을 찾는다. 그는 자연의 사다리, 모든 생명들이 서로 어떻게 엮이는지 그리고 어떻게 진보하는지를 밝혀 내는 것의 중요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조던에겐 신이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자연과 시간이 들어섰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던이 추구하던 종들의 위계 관계의 모래성을 알아보게 되었다.

사실 물고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조류와 파충류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속적인 '나'(테세우스의 배)도 중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일반적으로 믿음을 싫어한다지만, 사실 믿음 없이는 과학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개념을 다루게 되면,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그것이 어떤 뚜렷하고 일관된 성질을 가진 것처럼 생각한다. 진화의 배경인 '자연' 또는 '세계' 역시 이를 피할 수 없다.

누군가는 자연에서 약육강식을 보고, 세상은 약육강식의 냉혹한 현장이라 말한다.

혹자는 자연 안의 넘치는 호혜성을 보고 세상은 서로 돕는 것들의 무대라고 말한다.

'자연'을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면서 우리는 그것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어떠한 성질이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자연은 냉혹한 경쟁의 세계이며 호혜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양가적인 무언가인가?

위와 같은 시각에도 역시 자연을 '개체'의 시선에서 정의해야한다는 가정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답이란 소리인가? 정보들의 보존과 변이일뿐인가? 아니면 엔트로피로 설명되야하는 특정한 에너지의 흐름일까?

이러한 시각에서는 냉혹한 경쟁도 호혜적 네트워크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이러한 관점 중 무엇인가는 거짓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보기 위해선 수많은 렌즈로 이루어진 특정한 안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합리적 인간을 믿고 경제학이 이끄는 대로 세상을 설계했고

진보가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 거란 믿음으로 발전을 옹호했으며

추상적인 숫자로 이루어진 가상의 가치체계로 모든 것의 자리를 지정했다.

모든 의미는 거짓이자 진실이다. 우리는 믿음을 능숙하게 활용한다.


저자는 세상이 본질적으로는 무의미하다는 이런 성질을 자신의 인생의 실수에 적용한다.

물고기의 범주를 포기하는 것처럼 저자는 삶의 바른 형상이라는 환상에서도 벗어났다.

그리고 여기에 이 책이 불편하게 다가오는 오류가 있다.


룰루 밀러는 혼돈을 마주 보고도 결국 그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진 못 했던 것 같다.

저자는 자연의 무의미함을 설파하면서도 삶의 가치를 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밀러는 자신이 버린 멘토, 데이비드 스타 조던처럼 자신을 지탱해 줄 다른 질서를 원했고

그녀의 멘토에게 '자연의 사다리'가 해준 역할을 '민들레 법칙'이 대신하였다.

민들레 법칙은 그녀의 실수를 합리화하는데 쓰였고, 그녀의 삶에 다른 질서가 자리잡게 해주었다.

실재가 어떠하든 간에 그것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자연주의적 오류, 우리 모두가 심취해 있고 버리기 힘든 그것


오류의 적용까지 그녀가 부정했던 멘토와 닮았다는 점은 이 책을 굉장히 역설적으로 흥미롭게 느껴지게 한다.

그녀는 진실의 앞에서 왜 도망친 것일까? 아버지가 성급하게 전해준 무의미에 대한 저항감이 여전히 그녀를 옭아매는 것일까?


그녀가 자연주의적 오류를 저질렀음이 명백함에도 그녀를 비난하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진실이야 어떠하든 우리는 어떻게든 우리의 인생을 색칠할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어느 거짓에 귀의하는가가 우리를 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