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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쓴다는 건 무엇인가 정리 ⅱ.
·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정리 ⅰ.
·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정리 ⅱ.
·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정리 ⅲ.
·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정리 ⅰ.
·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정리 ⅱ.
앞에서는 작품이 가지는 자유에 대한 호소성을 통해
작가와 독자 사이에 형성되는 특별한 관계성을 조망하였다.
이제 마침표를 찍을 차례인데,
그 전에, 사르트르는 두 가지 정도를 더 짚고 가고 있다.
첫 번째, 미적 대상과 실체성
사르트르는 앞서 말했듯 자연미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왜나하면 자연은 엄격한 규칙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엄격한 규칙성이라는 것은 관찰자인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말에 의하면 물질은 수동적이고 인간은 자유롭다.
<폴 세잔, 『큰 나무들』, 캔버스에 유채, 1903.>
위 그림에서 나무가 정해진 위치에 있는 건
마치 인과관계의 연관성을 지닌 채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나무가 그 자리에 있는 건
화면의 나머지 부분이 이러한 형태와 색채를 전경에 요구했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서 그림 전체가 합목적성, 목적으로써 존재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현상학적으로 나타난 그림 너머의 합목적성을 통해
자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합목적성이 형태나 색채보다는
물질적 상상력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사된 그림의 소재와 표현 그 자체보다는
사물들의 실체와 원형질이 그림의 형태들을 존재하게 만든 것이다.
(사실 필자는 사르트르가 채용하는 후설 현상학 등을 잘 알지는 못해서
관련 내용이 다소 정확하고 세밀하지는 못함; ㅈㅅ)
이 뒤는 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재현된 대상들은 우주라는 배경하에 나타난 것이고,
우리는 그림을 볼 때 온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창조적 행위는 대상들을 생산/재생상함으로써
세계 전체의 탈환을 겨낭하게 된다.
예술의 종국적 목적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그 근원이 인간의 자유에 있는 듯이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재획득하는 데 있는 것이다.
작가가 남들의 자유에 호소하기를 선택한 것은
양자간의 요구의 연계를 통해서 그들이 존재의 전체를 인간에게 다시 귀속시키고
인간의 수중에 세계를 사로잡기 위해서이다.
즉, 인간은 예술을 통해 세계를 품을 수 있다.
결국 앞에서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이다.
이 다음, 두 번째. 미적 쾌감/미적 희열
사르트르는 이 느낌이 나타남으로써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앞에서 말했듯,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이 희열도 작가 자신으로선 절대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독자의 미의식이 작품과 일체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 미적 희열이라는 것은 목적/수단의 실용 관계를 일시적으로 초월하고
절대적 목적, 그러니까 가치의 인식하고 일체를 이룬다.
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자유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은 곧 희열이고,
나의 자유는 순수한 자립성은 물론이고 창조적 활동으로 자신에게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창조물이 창조자에게 대상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창조자가 창조물을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인 것이다.
그런데 이 향유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또한 본질적이라는 비정립적 의식을 수반한다.
(정립적 의식이란 존재를 존재하는 것으로 대상화하는 의식,
반대로 비정립적 의식은 자신을 존재하는 것으로 대상화하지 않을 때 의식,
그러니까 전자는 내가 파악하고 있는 물체를 존재하는 대상으로써 인식하게 되는 것,
후자는 그렇게함으로써 나 자신의 실존은 의식하지 않게 되는 것.
사르트르는 이것을 담뱃개비를 세는 행동으로 비유했는데,
담뱃개비를 세고 있을 때, 나는 그 담뱃개비를 의식의 대상으로써 의식하게 됨. 이게 정립적 의식.
반대로 그걸 세고 있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대상화되지 않음. 이게 비정립적 의식.)
이것이 사르트르의 표현에 의하면 '안정감'을 이루게 되고,
이것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엄밀한 조화에 대한 인식에서 유래한다.
한편으로 미적 대상이 상상에 의해 다다르는 세계이기 때문에,
미적 희열에는 세계가 가치라는 정립적 의식이 따른다.
사르트르는 인간 기도(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꾀하는 것)의 미적 변용이라 부른다.
결과적으로 우린 미적 희열의 움직임을 통해,
사실을 가치화하려는 그런 움직임을 통해서, 세계라는 대상을 존재시킨다.
그리고 다음에 말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지금까지 언급한 구조에서는 사람들의 자유 사이 협약에 전제되어 있다.
이 말은 결국 어떤 작품을 읽는 행위라는 것은,
우리가 같은 작품을 읽을 때 같은 기쁨을 느껴야 한다는 요청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르트르는 인류 전체가 자유에 현존하며,
자신의 세계인 동시에 밖의 세계인, 그런 공통의 세계를 존재하게 만들고,
여기에서 미적 희열에 있는 정립적 의식이 세계를 이미지로 존재하게 만들고,
비정립적 의식은 인간 전체가 신뢰와 보편의 대상으로서
자유의 조화를 현실에 내포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쓴다는 건 세계를 드러내는 것ㅡ독자의 고매한 마음이 수행해야 할 과업으로써 세계를 제시하는 것
이것은 또한 현실적 세계란 행동을 통해서만 드러나기에, 변혁을 위하여 세계를 초월할 때 드러나기에,
소설가는 쓰기를 통해 초월을 향한 움직임을 보여야한다.
이제 이 모든 전제가 사르트르만의 참여문학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야기 속 세계의 밀도는 작가가 세계를 변혁하려는 의욕이 강할수록 정교해진다.
중요한 건 이때 단순히 부정을 관조시키는 건 불가능하고, 그 부정을 초월함으로써
세계에 존재하는 부당함을 드러내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독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작가가 말하는 부정을 읽기라는 행위로 받아들이는 순간
독자 역시 그에 대한 연루자가 되어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두 사람은 작품을 통해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러니까, 요지는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그저 세상의 잔인함을 전시해두는 것만으로 멈추면 안 된다는 것.
사르트르의 말에 의하면 '어두운 문학'이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어두운 색조의 작품도 결국은 자유로운 인간이 자유를 느끼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
다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은 있는데,
나쁜 소설은 독자에게 아첨하고 환심만 사려는 소설임
이 소설은 작가가 인간을 관조하는 자세로 내버려둠으로써
읽는 이의 자유를 불러일으키지 못함
이를 테면, 흑인이 백인에 대한 증오를 듬뿍 담은 소설을 쓴다면
그건 조금 과격할지언정, 소설적이고, 소설로 읽히고, 소설이 될 수 있을 거임
하지만 아무도 반유태주의를 찬양하는 소설이 읽힐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그런 소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자체를 의심하게 될 거임
결국 독자를 굴종시키려는 태도로 글을 쓰게 되면 작가는 곧 자기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꼴임)
조금 뜬금없을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글을 쓴다는 자유란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불가분리하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단락 전에 나치즘에게 굴종한 작가들을 통해 앞뒤 맥락을 이어보고 있지만 잘 와닿진 않음)
산문이라는 예술은 민주주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고,
한쪽이 위협을 겪으면 다른 한쪽도 위협받게 된다.
글쓰기로써 둘 다를 지키는 건 충분치 않기에,
작가 역시 무기를 들어 싸움터에 참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글쓰기는 자유를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글쓰기를 시작한 이상 작가는 참여하고 있는 것.
그럼, 자유를 지킨다는 것은 어느 편의 자유를 뜻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작가는 결국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이 질문을 끝으로 글은 3장으로 향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후설현상학 너무 어렵다 이 말입니다.
3장에서는 독자의 범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
작가가 일반적으로 읽히기 바라는 보편 독자,
그리고 또한 사실상 작가가 겨냥하게 되는 잠재적 독자
이런 개념들을 특히 '리처드 라이트'라는 흑인 작가를 통해서 설명함
그리고 중세 신학에 의거하는 종교 문학가부터 시작해서,
귀족을 위한 문학가, 부르주아를 위한 문학가, 혁명 이후의 문학가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시대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누구를 위해 글을 썼는지를 설명하고 있음
이를 통해서 시대별로 훌륭한 작품이란 결국
'작가가 독자에게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깨닫게 하는 문학'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 세계에 대해 의문을 품고, 반역하게 되는 문학'이라는 걸 상기함
이것은 또한 시대풍류와 입맛에 맞춰서만 적어내린 작품은 절대 훌륭할 수가 없다는 것임
그런 작품은 결국 고전에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시대와 함께 묻히게 됨
『문학이란 무엇인가』로 정리하고 싶은 내용은 거의 끝났고,
필자는 강연록으로 마지막 빌드업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사르트르 문학을 맛볼 예정
맛있겠다에요
근데 사실 요즘 책 읽을 시간이 없음 ㅎ;
어쨌든 3장 정리는 정말 언젠가
뭔가 혼자 정리하려고 올린 거였는데 생각보다 관심 기울여줘서 고마움
이게 잠재적 독자라는 건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잘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