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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것이 문학인가? 만약 문학이 글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문학은 아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글쓰기를 통해서 무언가를 표현하려 하고 있지 않다. 외려, 이것은 일종의 선문답과도 같다. 주아나와 오타비우라는 두 사람의 생각 속에서 피어나는 느낌들을 감각적으로 포착하여 늘어놓음으로서 독자가 이 감각을 자기 안에서 반추하다가 문득, 그녀가 느낀 무언가 신성한 것이 가슴 속에 차오를 수 있게끔 유도하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일까? 물론, 인격화된 신만은 결코 아니다. 비대해진 자의식 또한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오로지 부정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무언가일까? 리스펙토르는 그렇지 않다고 느끼고 있는 걸 테다. 그래서 이 무의미하고 비논리적인 감각들의 묶음 속에서 누군가는 분명 팟, 하고 자기 속에서 피어오른 그 신성한 것을 표현해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를 알려주기를.
서두의 <아버지……>는 이 글쓰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주아나는 <해와 나>라는 시를 짓는데, "'마당의 암탉들이 지렁이 두 마리를 먹었지만 나는 그 지렁이들을 보지 못했지.'"라는 내용을 들은 아버지는 당황스럽게 그녀에게 묻는다. 시 속에는 해와 주아나가 없는데 왜 제목이 <해와 나>인 것이냐고. 그녀는 바로 설명한다. "해는 지렁이들 위에 있고, 나는 그 시를 지었는데 그 지렁이들을 보지 못했으니……." 결코, 결코 그녀가 표현하고 있는 것 자체만을 봐서는 안 된다. 표현된 감각들은 그저 잔향에 불과하다. 문제는 다만 이 감각들을 우리가 읽고 자기 안에서 피워내고자 할 때, 어떤 것들이 이 감각을 피워내고 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리스펙토르는 배경만을 그려내고 있는 작가다. 너무나도 꼼꼼하게 그려, 우리가 그 여백과 지워진 행간으로부터 이 뒤에 숨겨진 신성한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읽고 있으면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생각이 든다. 무언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었을 텐데, 윌리엄 블레이크 역시 이를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늘 실패한다. 광적인 희열과 자만에 가득 차 자신이 느낀 감각과 그 신성한 구조를 득의양양하게 표현하다가도, 결국 그것이 신성한 깨달음이 지나간 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리스펙토르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다만, 그녀는 이 결론을 선취한다. 느낌을 포착해 생각 속의 언어로 탈바꿈시키려고 계속 노력하면서 그 미끄러운 느낌에 손을 덧대고 있자니, 단지 미끄러져서 의식 깊숙히 숨어버리는 것 뿐 아니라 이 언어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느낌을 덧칠하고 있음을 깨닫고 경악하며 손을 떼버리고 만다. 아니, 아니, 아니, 그것은 분명히 신은 아니다. 그것은 나는 아니다. 나는 나에게 기도를 올리며, 나에게? 하지만 그렇다면……
일전, <달걀과 닭>으로 리스펙토르의 글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G. H.에 따른 수난>을. 당시에는 그녀가 이 글쓰기를 통해서 대체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 건지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비로소 이해한 것 같다. 추정하건대, 리스펙토르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첫 글로 접하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원래 전경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일 때, 누구나 그리 쉽사리 직접 여백을 채워나가지는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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