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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 폐허가 우리를 덮쳤을 때, 복구를 염원하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노력했다면 충분히 재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나나 회사가 못쓰게 만들어 놓은 들판에 나가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잡초들을 뽑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썩은 잎은 초조해하면서도 과거나 미래도 믿지 않는 것만 배운 상태였다. 단지 현재만 믿고 현재 속에서 자신들의 게걸스러운 탐욕을 채우는 것만 배웠다. 썩은 잎이 떠났고 그것 없이는 마을을 재건하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썩은 잎이 모든 것을 가져왔고 모든 것을 가져갔던 것이다.
- 송병선 역, 『썩은 잎』,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16.
마르케스를 처음 접한 건 『백년의 고독』이었다. 그때는 첫 장만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펼쳐서 정말로 1장까지만 읽었고, 뒷부분은 보류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남짓이 지났고, 오늘 썩은 잎을 읽었다. 어제부터 읽었다. 이틀이었다.
마르케스의 문장에서 가장 특기할 점이라면 '공감각'이다. 그는 시각과 후각, 후각과 청각, 청각과 촉각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문장들을 펼쳐나간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그려내는 미문은 아름다운 미문보다는 한층 더 오묘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전체적인 톤 때문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그의 문장구사력은 독특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좋다. 나로서는 이외에 미사여구를 더 덧붙이는 게 부끄럽다.
썩은 잎은 이러한 문장을 바탕으로, 하나의 시간선을 겹겹이 보여주며 한 시대의 역사를 녹여내고 있다. 썩은 잎의 표면적인 서사는 대략 30분 정도다. 하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가상의 마을 <마콘도> 속 이야기에는 한 세대의 역사가 들어있고, 나아가 콜롬비아의 길고도 짧은 역사가 마르케스만의 방식으로 애도되고 있다. 그들은 시종일관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동세가 어디를 향하든, 그들은 움직인다. 죽어가는 시간 속에서,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썩은 잎>의 잔해를 거두려 애쓰며.
<썩은 잎>이란 '원래의 것에 상처를 입히고 궁지에 몰아넣는 이상한 혹은 외국 근로자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20세기 초반, 혼란스러웠던 남미 사회에서 자기 잇속만 챙기는 부랑자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썩은 잎>은 특정 대상이라기보단 마치 현상과도 같이 그려진다. 그것은 콜롬비아라는 한 인간에게 닥친 짧으면서도 긴 열병이다. 썩은 잎 사태 이후로 <마콘도>는 역병이 들쑤시고 간 땅처럼 메마르게 되고, 이곳에서 인물들의 운명들은 수없이 교차되고, 결정되며, 끝을 맞는다.
<마콘도>라는 마을과 '바나나 회사', 그리고 독붕이들은 친숙할 이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등이 작중 간간히 등장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백년의 고독』과 연계해서 보는 편이 가장 좋긴 하겠다. 이 점은 글쓴이가 『백년의 고독』을 완독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언급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런저런 알레고리들을 제외하고 보아도, 『썩은 잎』이 호소하는 분위기는 매우 독특한 동시에 먹먹하고, 쓸쓸하며, 왠지 모르게 아름답다. 그냥, 그곳에 삶이 있었을 뿐이다. 마르케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 <마콘도>가 있다. 한 집안이 있고, 한 사람이 있고, 한 사랑이 있고, 한 운명이 있고, 그렇기에 <마콘도>가 있다. 그리고, 뭐, 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젠 아무도 없을지도..
결과적으로 『썩은 잎』은 사태와 운명이 뒤엉켜 휩쓸고 간 것들에 대한 일종의 애도이자 조소다.
『썩은 잎』이 그 플롯의 난해함으로 좋은 평을 듣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콘도>의 서막을 여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이제 더 많은 삶을 볼 차례다. 그리고, 뭐, 거긴 어떤 대령이 있었겠지만, 이젠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썩은 잎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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