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편은 아니지만, 다음 발췌문만 봐도 번역어 선택 하나하나에 대한 고심이 느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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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에서 ‘중용’으로 번역되는 말을 본격적으로 쓴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중용’이란 말은 유교 경전인 『중용(中庸)』 에서 말하는 ‘중용’과는 적지 않은 차이를 갖는 것으로서, 단지 헬라스어 to meson과 mesotēs의 번역어일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상적으로 그런 뜻으로 쓰듯, 아리스토텔레스가 도덕적(인격적) 훌륭함, 곧 덕(aretē)을 지나침(過: hyperbolē)과 모자람(不及: elleipsis)이라는 양극단의 ‘중간인 상태(mesotēs)’ 또는 ‘중간인 것(to meson=the mean)’이라고 말한 걸 우리도 일본인들도 ‘중용’으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 건 사실이다.10)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처럼 도덕적 의미의 한정적 용어로 쓰고 있는 ‘메소테스(mesotēs)’가 플라톤의 경우에는 전혀 그런 뜻으로 쓰인 적이 없다.


..... 헬라스 사상사를 통해서 볼 때, 플라톤이 많이 쓴 알맞은 도(度) 곧 ‘적도(適度: to metrion)’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보다도 그 쓰임새가 더 포괄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중용’이 주로 도덕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한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와는 달리 플라톤의 경우에는 ‘적도’의 문제가 그런 도덕적인 의미의 중용은 물론 우주와 자연, 인위적인 기술 및 행위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 포괄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중용』 에서 말하는 ‘중(中)’ 또는 중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보다는 오히려 플라톤이 말하는 알맞은 정도 곧 ‘적도(適度)’와 그 연관성이 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중용』 제1장만 펼쳐도 단박에 확인되는 바다. 제1장은 중화(中和)를 말하고, 제2장부터 제11장까지가 중용을 말하고 있다. 제1장의 첫 구절은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일컫고, 성을 따름을 도(道)라 일컬으며, 수도(修道)를 교(敎)라 이른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성(性)은 사물의 성[物性]과 인간의 성[人性]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4장에서 하고 있는 주자의 주에 따르면,

“도(道)는 천리(天理)의 당연함이니, 중(中)일 뿐이다.”

라고 한다.11) 그러니까 이 첫 구절은 삼재(三才)를 다 아우르는 언급이지, 비단 인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하늘과 땅의 이치 그리고 사람의 도리를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성실을 강조하고 있는 제22장에서 확연해진다.

“오직 천하에 더없이 성실하고서야 그 성(性)을 능히 다할 수 있을 것이니[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그 성(性)을 다하면 사람의 성을 능히 다할 수 있을 것이고[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사람의 성을 다하면 사물의 성을 능히 다할 것이며[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사물의 성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것인즉[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와 더불어 참여하게 될 것이다[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마침내는 사람이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용장구(章句)의 맨 마지막 장(제33장)은 제1장의 뜻을 거듭 말하다가,

“상천의 일은 소리도 냄새도 없다[上天之載 無聲無臭].”

는 표현으로 끝맺는다. 이 마지막 구절을 두고, 젊어서부터 중용 사상에 관심이 많았으며 “동양 유교철학의 골자가 중용 사상에 있다고 확신했다.”는 박종홍은 “형이상적인 천리(天理)를 형용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고 했다.12) 

이는, 플라톤의 용어를 빌리면, 오관으로는 ‘지각되지 않는 것(to anaisthēton)’, 곧 지성(nous)에나 알려지는 것(to noēton)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첫 장은 다음 구절로 끝을 맺고 있다.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고 있는 걸 ‘중’이라 일컫되, 발하여 모두가 절도에 맞는 것은 화(和)라 일컫는다.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크나큰 근본이며, ‘화’라는 것은 천하에 언제 어디서나 공통된 도(道)이다. ‘중’과 ‘화’의 지극함에 이르면, 천지가 제 자리를 잡게 되고, 만물이 제대로 자라게 된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용』 제1장의 이 내용을 플라톤의 대화편 『필레보스』 에서 하고 있는 주장과 연결지어 보면,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다. 이른바 칠정(七情)의 기본인 희로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는 어찌 보면 아직 어떻게도 ‘한정되지 않은 것(한도 지어지지 않은 것: to apeiron)’으로 일단 간주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성격의 것인 셈이다. ‘한정되지(한도 지어지지) 않은 것’이 가리키는 것은 즐거움(hēdonē)이나 소리(음성) 그리고 형태 등, 곧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고, 이것들이 알맞게 또는 적절히 한도 지어지거나 한정됨으로써 여러 단계의 갖가지 것들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소리 또는 음성은 그 자체로는 아직 한도 지어지지(한정되지) 않은 것이지만, 이게 어떤 형태로 한정되느냐에 따라 온갖 종류의 음악이나 여러 언어권의 문자들로 표현되어 제시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플라톤도 이 세상에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한정되지 않은 것(한도 지어지지 않은 것: to apeiron)’으로 보고선, 마치 천명(天命)의 경우처럼, 이것들이 신들이 내린 선물인 듯이 말하고 있다.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신들의 선물이 어딘가 신들이 있는 데서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이를 통해 지극히 밝은 일종의 불꽃과 함께 던져진 것으로 어쨌든 내게는 보이네. 우리보다도 더 훌륭하고 신들에 더 가까이 살았던 옛 사람들이 이런 전설을 전해 주었네. ‘무엇이다(…einai)’라고 일상 말하게 되는 것들은 하나(hen)와 여럿(polla)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이것들은 한정(한도, 한정자: peras)과 한정되지(한도 지어지지) 않은 상태(apeiria)를 자기들 안에 본디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전설일세.”(16c)

곧 그런 상태가 모든 종류의 사물의 본성(physis)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도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것은 곧 성(性)이니, 편벽되지도 치우친 바도 없기에 ‘중’이라 이른다[其未發則性也, 無所偏倚故謂之中].”는 말과 어딘지 일맥상통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니 이런 중용의 내용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단순한 도덕적 의미의 ‘중용(mesotēs)’보다는, 플라톤이 ‘적도(to metrion)와 균형성에 적중(敵中)하는(tychousa) 것’이 혼화(混和: krasis)라고 한 대목도 “발하여 모두가 절도에 맞는 것은 화(和)라 일컫는다[發而皆中節謂之和].”는 대목과 거의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필레보스』편의 이런 내용들은 뒤에 가서 다시 다루게 될 것이기에 이쯤에서 일단은 접어두기로 하자.13) 그래서 박종홍은 일찍이 같은 논문에서 서양의 중용 사상과 관련하여 이런 점을, 비록 간명하게나마, 정곡으로 찔러 언급했다.14)


-박종현, "적도 또는 중용의 사상"



‘아름다운 나라’로 불리는 이 나라의 정체(politeia)는 이중으로 불릴 수 있겠으니, “통치자들 가운데서 특출한 한 사람이 생기게 될 경우에는, ‘왕도정체(王道政體: basileia)’라 불리겠지만, 여럿이 그럴 경우에는, ‘최선자[들의] 정체(最善者政體: aristokratia)’라 불리겠다”(445d)고 한다. basileia는 ‘왕정(王政)’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 그리고 『정치가』 편에서 왕도정체(basileia, kingship)로 옮겨야 하는 것은 역사상의 실제 왕(basileus)이 통치한 군주정체, 또는 왕정과 같은 1인 정체(monarchia)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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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정체(monarchia)들 중에서도 공동의 편익을 목표로 삼는 정체를 우리는 왕도정체(basileia)로 일컬어 버릇하고 있는 반면에, 1인보다는 많으나 소수인 사람들의 정체는 최선자 [들의] 정체(aristokratia)라 하는데, 이는 최선자들(hoi aristoi)이 다스리기 때문이거나 나라와 이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인 것(to ariston)을 목표로 하여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대중: to plēthos)가 공동의 편익을 목표로 정체에 관여할 때는, 모든 정체들에 공통된 명칭 곧 politeia (시민정체)로 지칭된다.”[발췌자 주: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79a-b]

이것들의 탈선 형태들은 각기 참주정체(tyrannis)와 과두정체(oligarchia) 그리고 민주정체(dēmokratia)이다.

“참주정체는 1인 통치자의 편익을 목표로 하는 1인 정체인 반면에, 과두정체는 부유층의 편익을 목표로 하고, 민주정체는 빈곤층의 편익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이들 정체들 중의 어느 것도 공동의 이익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한데 여기서 필자가 ‘시민정체’로 번역하고 있는 시민정체(politeia)는, 방금 말했듯, 원래 모든 정체를 뜻하는 중립적인 명칭이기도 하지만, 우리말로도 달리 지칭할 마땅한 이름을 찾지 못해, 그 취지를 살려 일단 그리 지칭하기로 한 것이다. 영어권에서도, 달리 번역할 도리가 없었는지, 그냥 constitution, polity 또는 ‘과두정체와 민주정체의 혼합체(mixis olgarchias kai dēmokratias)’(1293b34)라는 뜻으로 mixed constitution(혼합정체)으로도 일컫는다. 그러나 내가 이 정체를 ‘시민정체’로 번역한 것은 이 정체가 ‘시민들(politai)이 공동의 편익(to koinon sympheron)을 목표로 하여 다스릴 수도 있고 다스림을 받을 수도 있는 정체’를 뜻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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