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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유품으로 남는다. 유품은 우리에게 남는다.
우리는 유품으로써 죽은 사람을 남긴다.
남긴다.
1. 재현과 고민
이 소설은 파손되어 조만간 사라질 위기에 처한 'L(이한열이라는 이름 대신 내내 이 이니셜로만 나온다)'의 운동화를,
한 복원가가 자신의 손으로 '재현'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L의 운동화는 김숨이 이전에도 이미 여러 번 시도했었던 「재현」 소설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알레고리 자체가 재현에 집중되어 있고,
재현의 발현, 재현의 방법, 재현의 과정, 그리고 재현된 재현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메타 재현 소설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오래 전부터 고민한 것으로 보이는,
재현의 본질에 대한 흔적들이 계속해서 드러난다.
작가는 복원가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그들이 지나왔던 역사적인 사건들과,
무수히 사라지고 다시 살아났던 복원의 사례들을 통해 다시금 재현의 행보를 되돌아보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요소들을 툭툭 던져가며 답을 내려 한다.
재현이 일어나는 곳, 재현이 이루어져가는 과정,
재현자들의 생각, 재현을 이루는 어떤 실재와 물질,
나아가 우린 어떻게 재현하면 좋을까?
무엇이 좋은 재현일까?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또는 독자들에게 던져 재현에 대해 환기시키려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소설은 결코 얕지 않은 고민을 담고 있지만,
재현과 정치가 지니는 일종의 한계성으로 인해 다소 교조적이거나 피상적인 모습도 보인다.
재현이 정해져버리는 것. 재현이 완성으로 나타나는 것.
재현이 제시되는 것. 또는 재현의 과정을 자꾸만 되뇌는 것.
이것은 작가가 지닌 고민의 깊이와는 무관하게 피상적인 것으로 변모하여 독자를 들쑤시게 된다.
개인적으로, 자꾸만 주제가 축소되고 있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물론 작가가 이것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킨 것은 아닐 터다.
작가는 부단히 뛰어다니며 복원의 사례들을 수집했고,
대상을 '어떻게 그려내면 좋을지를 고민하는 것'을, 어떻게 그려내면 좋을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 대답은, 솔직히 필자로서는 잘 모르겠다.
이 감상도 결국 실패한 소설의 재현일까? 잘 모르겠다.
2. 기억을 보는 것, 거울을 보는 것.
재현에 대한 답보다도 필자가 매력을 느낀 부분은,
이 소설에서 그려내는 '기억의 굴절성'이다.
너무 이상한 비유가 아닐까 걱정되지만, 모쪼록 양해를 구하고 차차 설명하겠다.
『L의 운동화』에서 운동화는 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한 역사가 되기도 한다.
운동화는 아무런 미사여구 없이 운동화거나, 또는 L의 운동화일 수도 있지만, 6월의 운동화일 수도 있다.
그러면 이 형태는 어떻게 변하는 걸까?
우리는 죽은 이의 초상을 그릴 때, 죽은 사람을 보면서는 절대 그릴 수 없다.
그 답은 너무 간단하다. 죽은 이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죽인 이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기억이라는 작은 파편들을 통해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시 굴절이 일어난다.
L의 운동화에서 복원가가 복원하려는, 복원한, 또는,
또는 이미 복원되었던 그의 파편들(그의 의복과, 그의 운동화)은 굴절된 채로 전시장에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본 순간부터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거울 너머의 '그'가 아닌 굴절된 형상의 '그'다.
복원의 과정에서 '원래(또는 원래라고 믿었던)' 그는 굴절된 채 고정되는 것이다.
작중의 화자 또한 이러한 부분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비치기도 한다.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L을 집어삼켜서는.'
'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
화자는 자신이 복원하는 것이 역사적 굴절로 굳어진 'L'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또 이런 고민도 있다.
만약 벗겨진 운동화의 주인이, L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였다면?
쓰러진 이가 L이 아니라, 그 옆, 또는 그 옆의 옆의 누군가였다면?
우리는 누구를 기억하고, 누구를 기억하지 않는가?
누구를 보고 또 누구를 잊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한 사람을,
그러니까, 역사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이런저런 거울로 굴절된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는 죽은 사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걔는 참 좋은 사람이었어.' '걔는 성실하고, 부지런했지.'
이건 비교적 거리감이 가깝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대가였고, 정치의 화신이었소.' '그의 희생으로 이 나라는 성공을 맞았소.'
이런 이야기는 우리에게 있어서 조금 피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올바른 기억법'을 찾겠다는 생각 역시 피상적이다.
한 사람이 굴절되는 순간, 그는 이미 우리에게서 멀어진 채 다가온다.
우린, 거울 너머로는 들어갈 수 없는 걸까?
3. 굴절시키기, 한없이 굴절시키기.
소설은 다양한 시선들을 동원하여 'L'을 굴절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정확히는 수없이 굴절시켜서 그 너머를 보려고 애쓴다.
굴절은 저마다 다르게 나타나기에, 그 굴절들을 모으면, 얼추, 어느 정도는,
거울 너머의 모습을 조금은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화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시선들이 모이며 이야기는 신화의 자리에서 내려온다.
'L'이 아닌 '이한열'의 이야기로.
아들이었던, 동기였던, 자식이었던, 학생이었던,
살아있었던, 살아있던, 살아있는,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로.
그리고 거기에는 운동화로 남은 그가 아닌,
운동화를 신은 채 걸음을 옮기는 그가 있다.
'L의 운동화'가 아닌
'이한열의 운동화'가 있다.
'L의 운동화가 내 작업대를 떠나, 뚜벅뚜벅 작업실을 걸어 나가는 상상을 한다. 복도를 통과해 보존연구소 출입문 밖으로 걸어 나가는. L의 운동화는 골목을 헤매다 도로에 이른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어 선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다. 차들이 뜸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비둘기 한 쌍이 어슬렁거리는 쓰레기통 앞을 지나,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간다. 개찰구를 통과한다. 지하철이 서고, 문이 열린다. L의 운동화는 잠시 주춤하다 마침내 온갖 신발들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4.
결과적으로 한없이 이야기하고, 또 한없이 굴절시키는 방식을, 김숨은 채택했다.
이것이 중첩해서 '증언 소설'을 내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할 것이다.
솔직히 이런 주제에 관심없는 사람한테 본 소설을 권하는 건 좀 그렇다.
그래도, 뭐, 사람 들쑤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거울 너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아할지도 모른다.
한 번쯤은 읽어도 나쁘지 않을 소설이다.
앞서 말했지만, 이 소설에 담겨있는 고민들이 그리 얕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좋아하는 작품을 하나 더 읽는 편이 독붕이들 입장에선 행복할 것이다.
독붕이라면 책을 읽고 행복한 게 제일 아닐까. 잘 모르겠다.
모쪼록 행복하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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