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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이 파트에서 사르트르는 가장 먼저 독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세운 전제에 의하면, 작가는 보편적 독자를 위해서 쓴다.

왜냐하면 작가의 요청은 '모든' 사람에게 지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작가의 글이란 결국 같은 시대의 독자를 향하는 것이다.

이 말은 작가의 존재가 역사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데,

사르트르가 여기에서 짚고넘어가는 역사적 존재는 흔히 말하는 동시대성, 현재성의 의미와 비슷하다.


책에는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모든 세계가 밑에 깔려있고,

결국 작가는 동시대인에게, 동포에게, 같은 인종과 계급의 형제들에게 이야기하게 된다.

사르트르가 그토록 강조하는 해방도 이러한 세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사르트르 표현을 옮기자면, 세계의 어떤 면을 들어올리는지에 따라서 독자가 결정되고,

이 말은 곧 어떤 독자를 선택하냐에 따라 작가의 주제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작품에는 그것을 겨냥하는 독자의 이미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향만으로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좋은 접근법은 아닌데,
사르트르는 일전에 그랬듯 시점을 작가에서 독자로 돌려놓는다.

그리곤 이렇게 설명한다. 독자는 작가를 부른다. 독자는 기다림이며 채워져야 할 빈터이며,
비유적 의미와 본래적 의미의 양자에 걸쳐서 아스피라시옹(본래는 빨아들이기라는 뜻, 비유적으로는 희구/갈망. 정명환 역자분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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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진 조금 어렵지만, 사르트르는 '리처드 라이트'라는 작가를 통해서 이 이론을 조금 더 쉽게 풀어놓고 있다.

요지는 독자란 결국 이중적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작가는 분열된 양자를 품에 안음으로써 동시에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사르트르가 예를 드는 '리처드 라이트'는 흑인 작가로, 우리나라에도 『깜둥이 소년』, 『미국의 아들』 등이 번역되어 있다.

제목만 봐도 그가 어떤 주제의 글을 쓰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길, 라이트가 겨냥하는 독자는 보편적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을 혼내주려는 것도 아니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남부 늪지대 흑인 농민들에게 글을 읽히려는 것도 아니다.

또한 유럽에서 그의 글이 고평가를 받는다고 해도, 그가 유럽인들을 위해서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라이트가 겨냥하게 되는 것은 글을 아는 북부의 유식한 흑인들이며, 선의를 지닌 미국 백인들이다.

이것이 라이트의 글이 겨냥하는 독자들인 것이다.


반면 라이트가 이들을 독자로만 삼는 것도 옳은 말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는 '이들을 통해서' 결국 모든 사람을 겨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추상적인 가능성으로 문맹 흑인들과 차별주의자들을 겨냥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맹도 읽기를 배워 글을 읽을 수도 이고, 흑인배척론자의 손에 그의 글이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상의 보편적 독자들 사이에서 분명한 단절이 일어난다.

만약 흑인 독자가 그의 일을 읽는 경우에는 주체성을 포함한다.

같은 유년 시절, 같은 곤경, 같은 콤플렉스를 지닌 그들은 이심전심으로 글을 이해하고,

작가는 자신의 상황을 밝히는 것으로 그들 모두의 상황을 밝혀준다.

여기에서 라이트는 분명한 매개자가 된다. 라이트의 움직임이 동족 모두의 움직임이 되는 것이다.


반면 백인 독자의 경우에는 아무리 훌륭한 선의를 가진 자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타자일 수밖에 없다.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유추에 의존하고, 유추는 오해를 낳는다.

또 라이트 입장에서도 백인 독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라이트가 종이 위에 적어 내려가는 말들은

백인이 쓸 때와 흑인이 쓸 때에 똑같은 문맥을 지니지 않는다.


결국 라이트의 작품은 이중성을 지니게 되고,

한마디 한마디 말이 두 갈래의 문맥에 걸쳐 있다.

만약 라이트가 백인만을 대상으로 삼았다면, 글은 더 장황하고 교훈적이고 모욕적이었겠고,

흑인만을 대상으로 삼았다면, 더 간략하고 공감적이고 애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열된 독자를 위해서 쓴 라이트는 그 분열을 간직하는 동시에 넘어설 수가 있었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현대적 작가의 기본적 입지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근원적 갈등을 업은 존재이다.

그는 작가를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 사이에 끼어있는 자로 보았으며,

작가가 기본적으로 지배 계층의 요구에 응하면서도 그 이해 관계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사르트르의 작가, 나아가 지식인에 대한 입지는 국내에도 번역된 강연록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사르트르는 12세기 종교 문학 이야기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또 언젠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