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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백 페이지 가량을 읽어나가다가, 문득 책 표지의 저자명을 다시 확인했다. 이 사람이 이런 글도 썼던가? 분명 상당히 흥미로운 SF다. 읽으면서 지루한 적이 없었고, 시대를 감안하지 않아도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로 휙, 휙 이야기를 바꾸며 진행해나간다. 다만 확실히, 아베 고보의 다른 글들, <모래의 여자>나 <불타버린 지도>, <타인의 얼굴> 등을 생각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약간은 실망할 테다. 여기에는 그 괴상하고 혼란스러운 감각은 없다. 어쩌면 SF이기에, SF적 소재에 이미 그 혼란스러움이 완전히 다 녹아 있기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읽었을 때의 충격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4 간빙기>라는 제목의 의미는 서두에 살짝 암시만 되었다가 소설의 절반쯤에야 분명하게 드러난다. 앞부분의 이야기는 애초에 제목과 완전히 동떨어진듯 해보이는데, 소련에서 "모스크바 1호"라는 이름으로 만든 예측 기계-그러니까, 컴퓨터-의 미래 예측 능력에 발을 맞추기 위해 일본에서도 이를 만들었다가, 소련이 2075년에는 공산주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이 출력되었다, 하고 발표하는 식으로 정치적 예견으로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기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덕분에 비교적 비정치적이고 미시적인 것, 이를테면 한 개인의 삶, 과거와 미래를 보는 식으로라도 활용해볼 수는 없을까, 살인 사건의 단서를 찾는 방식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식의 탐색을 계속한다.
그 과정에서 <제4>는 스릴러 소설처럼 빠른 속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행자와 적들을 뒤로 한 채 예측 기계의 활용과 주변 인물들의 수상한 반응 따위를 보여준다. 어느새 예측 기계라는 소재는 슬쩍 뒤로 한 발짝 물러난 채, 임신 3주차의 배아들을 낙태해 데려가고 돈을 주는 수상한 단체가 중심 소재가 되며, 이 미스테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 드디어 제목의 의미가 드러난다. 주인공의 조수는 그를 일종의 해저 생물 연구소에 데려가며, 육지 생물들이 분화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조작을 가해 해저 생물로서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든 결과물들을 보여준다. 당연하게도, 사람 역시 그 대상 중 하나며, 이미 수 백 명은 되는 수중인간들이 분화해 점차 성장해나가고 있다. 제4 간빙기라고 하는 새로운 간빙기가 곧 찾아올 것이며, 대부분의 땅이 물에 잠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역자 후기에서도 언급되는 바 있지만, 아마 추측해보건대, 아베 고보는 수중인간에 대해 예전부터 상당한 생각을 해왔을 테다. 생물체의 분화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화학 처리 및 생육 과정 등의 서술을 보면서 흥미롭기도 했고, 진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참 안타까운 일인데, 아베 고보의 글이 아니었다면 참 재밌게 읽었을-시대를 감안해도!-SF지만, 역시 아베 고보의 글이라고는 참 믿기지가 않는다. 좋은 뜻으로도 나쁜 뜻으로도. 이 사람이 이렇게나 흥미롭고 재밌는 SF 소설을 쓸 수 있었던가? 이 사람이 이렇게나 통속적인 소설을 쓸 수 있었던가? 뭐, 사실 사람이 보여주는 면모는 늘 다양하기 마련이겠지만.
그리고 책 말미에 실린 <제4 간빙기 다시 쓰기> 단편은 대체 뭘 위한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굳이 이런 기획을 했어야 했던가, 하는 질문은 일단 둘째 치더라도, <제4 간빙기>와의 연관성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단편이라서, 원. 사람보다 사람 같은 로봇이 어떻게 사회에 일반적으로 녹아들며 늘 로봇 같다는 말을 들었던 사람의 어쩌고, 저쩌고 자체도 너무 질린다......
(예측 기계나 수중 인간은 질리지 않느냐고? 글쎄...... 사실 이야기가 마지막에 어떻게 흘러갈지는 약간은 뻔하게 짐작가는 구석도 있긴 했지만, 그런 것만으로 매력을 잃지는 않는 글이었다. 밸러드가 쓴 <물에 잠긴 세계>를 읽으면서 정말 물에 잠긴 세계에 대해 예상되는 것들을 그려냈다고 질리진 않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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