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5x-ZrB7c8Y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은
올해 다 가기 전에
다 읽는게
끝내는게 맞겠지?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801023005
닉슨은 노년에 접어든 에드거 후버가 이끄는 연방수사국(FBI)이 무력하다고 보고 찰스 콜슨(1931~ 2012) 보좌관에게 적으로부터 미국 정부를 지킬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콜슨은 닉슨 정부를 적대시하는 인물 명단(에너미리스트)을 작성했는데 민주당 정치인, 신좌파 인물, 비판적 언론인은 물론이고 폴 뉴먼 같은 배우도 포함됐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콜슨은 또한 전직 중앙정보부(CIA) 및 FBI 요원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특별조사팀을 백악관 산하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비밀누출을 막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자신들을 ‘배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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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은 닉슨이 추구해 온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결실을 맺은 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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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주미 파키스탄 대사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파키스탄 대통령을 통해 닉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신을 백악관에 비밀리에 전달했다. 저우언라이는 미국 고위인사의 중국 방문을 환영하며 양국 간의 관계는 이때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닉슨은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할 것이며 자신은 이듬해에 방문해서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고 회신했다. 7월 1일부터 남베트남, 태국, 인도, 파키스탄을 순방 중이던 키신저는 파키스탄 체류 중 배탈이 나 대통령궁에 머문다고 발표했다.
7월 9일, 중절모를 눌러 쓴 키신저와 그의 일행은 전용기 편으로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해서 베이징에 도착했다. 키신저는 저우언라이 등 중국 고위층을 만나서 환담을 했다. 키신저는 미국이 중국을 적으로 삼는 국가와 연합하지 않겠다고 했고, 저우언라이는 미국이 아시아 전역에서 철군해야 한다고 말했다. 7월 15일, 닉슨은 키신저가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와 만났으며 자기는 이듬해 봄에 베이징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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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2/11/VIGDCX4V2ZBDDLUTCBD4WARQU4/
강태공(姜太公), 손무(孫武), 범려(范蠡), 귀곡자(鬼谷子), 장량(張良)에 이어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까지…. 남과의 싸움에서 희한하다 싶을 정도의 능력이나 생각을 선보였던 중국 유명 인물들이다.
중국은 그 싸움의 생각이 깊다. 일정한 패턴이라고 해도 좋을 명맥과 체계를 갖췄다. 이른바 ‘모략(謀略)’의 정신세계다. 우리는 이를 곧장 음모(陰謀)로만 푸는데, 사실은 그보다 중립적이다. 오히려 싸움 방도인 ‘전략(戰略)’으로 이해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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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임수가 판치는 음모의 반대는 양모(陽謀)다. 드러내놓고 벌이는 전략의 구성이다. 따라서 모략은 어두운 속임수로 내려앉을 여지와 함께 떳떳한 싸움법으로 올라설 가능성도 있다. 심술(心術)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저 ‘못된 마음’ 정도로 이 단어를 쓰지만, 중국의 용례로는 싸움에 관한 진지한 모색이다. 역시 하강(下降)과 상승(上昇)의 가능성을 다 보이는 모략의 동의어다. 싸움에 관한 천착이 깊지 않은 우리가 그저 어두운 측면만을 봤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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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략이 밝고 긍정적인 쪽으로 쓰이면 지모(智謀)다. ‘슬기로운 계책’의 뜻이다. 지혜로운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반대로 사용하면 권모(權謀)와 술수(術數)
유주열의 동북아談說-76] 젊은날의 덩샤오핑(鄧小平)
조계지 상하이의 일부 공원에서 서양인들이 중국인을 차별하여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에 놀란 덩샤오핑은 프랑스에서 선진 기술을 배워 낙후된 조국을 발전시켜 서양인으로부터 받은 수모를 씻어야겠다는 당찬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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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는 기원전 그리스 식민지로 건설된 역사가 오래된 프랑스 제2의 도시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프랑스로 입국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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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자신의 운명을 바꿀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를 만나게 된다. 6세 연상의 저우언라이는 유복한 백부를 두어 일찍이 일본 유학을 다녀와 세상 물정에 누구보다 밝았다. 1919년 5·4운동에도 난카이(南開)대학의 학생으로 참가했다가 1920년도에 근공검학 케이스로 프랑스에 왔다. 그는 모교의 장학금과 이스바오(益世報) 신문사의 유럽 통신원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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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가 공산혁명으로 허망하게 무너지고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위협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 통신원은 영국의 런던 및 에든버러 등을 방문 러시아 혁명 이후 유럽 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현실을 취재했다.
1921년 7월 중국에서 공산당이 창당됐다.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 등 근공검학 유학생들을 청년공산당에 가입시키고 츠꽝(赤光)이란 기관지를 발행했다. 당시 인쇄기술로는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등사판(mimeograph) 인쇄가 유행했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을 큰 형님처럼 따르는 덩샤오핑을 편집에 참여시켰다. 덩샤오핑은 기사가 작성되면 철필로 스텐실(기름종이)에 옮겨적어 찍어내는 작업을 담당했다. 덩샤오핑의 별명이 ‘등사판(油印) 박사’로 불린 것은 그때였다. 쓰촨성을 떠나본 적이 없는 시골 출신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를 알게 됨으로써 세계의 정세 동향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지식을 넓혀가면서 그를 통해 장래 중국 지도자들과도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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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기초로 1919년 3월 공산주의 인터내쇼날(국제공산당) 즉 코민테른을 조직 오히려 주변국의 공산혁명을 촉진시켰다. 그 후 1922년 12월 레닌은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 등 소비에트(노동자·농민의 자치기구) 사회주의 공화국들과 연방을 결성 소련을 탄생시켰다.
한편 중국(淸)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에 성공한 공화주의자들이 난징에서 쑨원(孫文, 1866~1925)을 임시대총통으로 추대 중화민국을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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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의 사망에 따른 혼란스러운 중국에 주목한 소련은 정부 차원에서 베이징의 군벌 정부를 지지하고 쑨원의 국민당에게는 코민테른을 개입시켜 지원했다. 코민테른은 자체 군사력이 필요한 쑨원에게 군사 고문단 파견을 통해 국민당 육군 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설립을 제안했다. 초대 교장에는 쑨원의 심복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맡았지만, 공산당 사상교육을 담당할 정치주임으로 저우언라이가 추천됐다. 1924년 저우언라이는 파리에 덩샤오핑을 홀로 남겨두고 광저우 황포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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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한 성격의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로부터 배운 공산당 이론과 조직관리를 통해 중국 유학생 사이에 책임자로 급부상했다. 그 무렵 공산당 이념에 빠져들고 있는 중국 유학생에 대한 프랑스 당국의 감시가 강화되고 그 중심에 있는 덩샤오핑에 대한 체포의 그물이 조여들고 있었다. 자신의 숙소가 수색되는 등 신변의 위기를 느낀 덩샤오핑은 소련으로 탈출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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