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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만하면 초기작 안읽고, 작가들 중후한 대표작 위주로 읽는 편인데, 이제는 왠만한거 다 읽어봤고, 솔직히 독서도 불감증이 왔다. 활자 읽어도 뭔가 참신한 맛이 없어서 이리저리 읽어보고 있다. 걔 중에서 작가들 초기작 읽으면서 작문 센스가 어떤가 싶어서 읽어보는 것도 있다. 김영하. 초반에 미술가니 작가니 나열하는 게 왠지 조선시대에 성현의 권위를 빌리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글 쓰면서 내가 저렇게 글 쓰나? 싶기도 하고, 나 이렇게 읽어봤다 지식을 어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주장이 좀 의존적인 인상을 받았다.
파괴문학 엄청 오래된 태고의 문학인데 비극 작품부터 치는게 맞을 거 같다. 오이디푸스는 눈을 뽑고, 오셀로도 칼로 자결하고, 브루투스도 패장이 되어 자결한다. 셋다 공통점은 파괴가 빚을 청산한다는 개념이다. 자기가 폐를 끼치거나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 가깝다. 패장도 역사에서 번번히 죽음으로 책임을 진 사례가 많다. 그게 강제든가 자발적이든가 사례가 많다. 그러면 뭔가 공정한 거래라는 개념이 있고, 정의라는 개념이 있다. 그러면 뭔가 지킬 가치가 있고, 책임도 있고, 사는 의미가 있다. 그게 명예라는 것과 가까운 개념이다. 뒤져서 공허함으로 돌아가더라도 능동적 허무주의지 수동적 허무주의는 아니다.
이 작품은 수동적 허무주의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게 예술이라면 파괴 자체를 미화하는 행위지. 파괴의 의미를 미화하는 건 아니다. 파괴는 철거해버리고, 더 최신식 건물을 짓는다는 약속을 함축한다. 정권이 하나 파괴되도, 새로운 정권이 드러서고, 밀알 하나 죽으면 10배로 늘어난다니 종교적 순교 개념도 포함되고, 비극작품에도 주인공 뒤져도 악역도 같이 뒤져서 세상은 조화로워지고, 좋은 미래를 기약했다.
도대체 데카당적이고 퇴폐적인데서 어떤 미학을 찾을수 있는지 모르겠다. 비극작품이라고 결코 데카당적인건 아니다. 자극적이긴 한데 뭔가 변태적이다. 세상에 별 희한한 도착증이 있으니. 교육의 요지도 세상 사는 의미를 가르치는데 있을 것이다. 의미를 제대로 가르치는 지 의문이다. 그런게 윤리교육이기도 한데 기성전통윤리 크게 한번 포맷되고, 대체된 윤리는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다. 역사적 맥락에서 우리 선택이 아니라 그렇게 할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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