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으로 있던 헤겔에게 한 서신이 도착한다. 발신자는 하이델베르크의 총장이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은 설립 이래 처음으로 선생님 같은 분을 철학자로 모시게 됩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전에 스피노자를 초빙하려 했던 일은 무위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스피노자는 1673년 3월30일자로 하이델베르크 교수 초빙을 거절했다.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의 철학 연구를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두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학에 있으면 기존 법률과 종교 계율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했는데, 이로 인하여 철학의 자유가 제한될까 하는 염려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한다.
"저를 제지하는 것은 결코 좀더 높은 지위에 대한 희망이 아니요 평안에 대한 사랑일 뿐입니다. 저는 공적인 교육 활동을 자제하면 얼마간 그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을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헤겔 또한 이 일화를 알고 있었다. 그는 <철학사 강의>에서 스피노자를 이렇게 평가한다.
"스피노자는 이 제의(하이델베르크 교수직)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분별있는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철학이 공식 종교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까지 그의 철학함의 자유를 제한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스피노자의 위대한 대작 <신학-정치론>은 익명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그 책에 기록된 신학적 사상들은 17세기가 담기에는 너무나 파격적이고 급진적이었다. 그가 대학에 있었더라면, 이 위대한 저작의 사유는 제한되었을 것이다.
익명으로 출판된 <신학정치론>과 그 정신을 이어 가명 "스피노자의 정신" 으로 발표된 <세 명의 사기꾼 : 모세, 예수, 마호메트> 를 보면 그의 신학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헤겔은 하이델베르크에서 1년간 머물면서 <철학요강[엔치클로페디]>, <미학>의 대계를 준비하였고 훗날 1818년 베를린대학에 자리를 얻게된다. 이 일화의 배후에서 한 가지 의미가 드러난다. 헤겔이 스피노자가 공석으로 남겨 둔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에 특히 주목할 것이다. 곧 이 계승/지양에서 헤겔은 스피노자가 성취하지 못한 또는 성취하지 않으려 한 과업을 완수했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기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다. 스피노자에게는 아직 진정한 철학을 공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계기가 도래하지 않은 것이다.
1816-1818년 동안, 스피노자의 계승자로 머문 곳에서의 강의록이 드디어 발견되었다.
ㅅㅂ 저 세명의 사기꾼 역자 이름이 왜 내 휴대폰 번호 예전에 쓰던 놈이랑 이름이 같냐 가끔 빚갚으라고 전화오던거 생각나네
얌마 저분 불어 역자 중 레전드야
125.128 ) 그래서 더 위험한거임
설마 사드 전집 번역하느라 빚이..
스피노자가 거절한 대학이 하이델부르크였다고? 자기 자유롭게 철학하겠다고 무려 하이델부르크 교수직을 거절 ㄷㄷ
http://www.senior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