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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국가의 관계 문제는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중세의 종결과 함께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그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종교개혁에 의해서 그리고 종교문제에서도 사법권을 소유해야 한다는 몇몇 통치자들의 요구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가톨릭교회에 관한 한 국가에 대한 완전한 종속이론은 불가능하였다. 그것은 교황청에 따른 그리고 교회와 교회의 임무에 관한 가톨릭 사상에 따른 입장에 의해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지배할 원리들을 제시해야 할 당위성을 느꼈다. 그래서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 Bellarmine, 1542-1621년) 추기경은 교황의 권력(De summo pontifice, 1581. 이것의 확장판 De potestate summi pontificis, 1610.)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교황은 세속사에 관해 직접적인 권력을 갖지는 않지만 간접적인 권력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충돌이 일어난다면 세속적 관심은 영적인 관심에 양보해야 한다. 세속사에서의 교황의 간접적인 권력이라는 이론은 벨라르미노가 시민통치자를 교황의 대리인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이론은 그러한 사상을 완전히 배제했다. 인간의 목적인 초자연적 목적, 말하자면 신의 지복직관(beatific vision of God)이다. 이러한 이론은 영국의 제임스 1세에 대항하여 쓰인 『가톨릭 신앙을 옹호함』(Defensio fidei catholicae, 1613)에서 프란시스코 수아레스(Francisco Suárez, 1548-1617)도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벨라르미노와 수아레스가 시민 통치자는 교황의 대리인이라는 사상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권신수설의 옹호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이론, 즉 시민 통치자는 자신의 주권을 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부여받는다는 이론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아레스가 『가톨릭 신앙을 옹호함』에서 이 이론에 반대했다는 사실은 제임스 1세기 그 책을 왜 태웠는지의 이유들 중 하나였다. 벨라르미노와 수아레스는 시민 통치자가 자신의 권력을 정치적 공동체로부터 직접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그들은, 모든 합법적 권위가 궁극적으로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시민 통치자가 자신의 권위를 궁극적으로 신으로부터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통치자의 권위는 공동체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이다.


......벨라르미노-수아레스의 주권 이론을 일차적으로 교회의 선동 혹은 정치학의 일부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일 것이다. 정치적 주권은 신민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은 11세기 로텐바하의 마네골트(Manegold von Lautenbach)가 제안한 것이었다. 시민 통치자들에게는 이행할 신뢰가 있어야 하고, 만약 그가 습관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남용한다면 그는 폐위되어야 한다는 확신은 12세기에 솔즈베리의 요한(John of Salisbury), 13세기의 아퀴나스(Thomas Aquinas), 그리고 14세기에 오컴(William of Ockham)에 의해 제시되었다. 벨라르미노, 수아레스와 같은 저술가들이 정치적 주권은 신민에게서 온 것이라는 이론의 보다 형식적이고 명시적인 진술을 부여했다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없이 그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적 자료에 대한 반성에 크게 기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단지 초기의 스콜라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일반적인 관념을 계승했을 뿐이다. 스페인의 예수회 일원인 마리아나(Juan de Mariana, 1536-1624)가 정치적 억압에 대한 치유책으로 폭군살해가 필요하다고 한 그의 불운한 진술을 했을 때 (그의 언급의 일부는 프랑스의 앙리 3세의 암살에 대한 옹호로 해석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저서인 『왕과 왕실 기관』(De rege et regis institutione, 1599)이 프랑스 의회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의 원리는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합법성의 원리에 다름 아니었다. 이 억압은 비록 마리아나의 결론이 오도되었기는 하지만 중세에서 통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시대의 스콜라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교회와 관련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공동체와 관련하여 다만 시민 통치자의 지위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들은 정치적 사회의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수아레스에 관한 한 분명한 것은 그가 정치적 사회를 본질적으로 동의나 합의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는 점이다. 신민들과의 계약에서부터 군주의 권력을 끌어내었던 마리아나는 정치적 사회의 기원을 정부에 선행하는 자연 상태를 따르는 것으로 보았다. 조직화된 국가와 정부를 향한 주요한 첫 걸음을 그는 사유재산의 제도 안에서 발견하였다. 자연의 상태라고 하는 마리아나의 가설에서 수아레스가 마리아나를 추종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록 그가 인간들 사이에서 국가와 같은 그러한 연합체가 시초부터 생겨났다는 점을 분명히 생각했더라도, 그는 적어도 종족들의 장들이 자발적 동의를 한 것이 국가의 기원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아레스가 이중 계약이론, 즉 하나는 종족들의 장들 사이의 계약, 다른 하나는 그렇게 형성된 사회와 그 사회의 통치자 또는 통치자들 사이의 계약을 주장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 정치적 사회는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것이고, 정부는 사회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와 정부는 순수하게 임의적인 것이거나 규약적인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다. 다른 한편 비록 자연이 정치적 사회를 필요로 한다 하더라도, 특정한 정치공동체의 형성은 통상 인간의 합의에 의거한다. 다시 말하면, 비록 모든 사회가 어떤 지배적인 원리를 가질 것을 자연이 요구한다 하더라도, 자연은 어떤 특정한 정부형태를 확정하지도 않았고 또한 특정한 개인을 통치자로 기획하지도 않았다. 어떤 사례들에서는 신은 통치자를 직접적으로 명시했다(예를 들면 사울이나 다윗). 그러나 보통의 경우 정부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공동체의 결정사항이다.


정치적 사회가 어떤 종류의 합의에 기초한다는 이론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우리는 고대세계에서도 합의의 전조를 발견할 수 있다. 중세 시기 파리의 장(Jean de Paris)은 자신의 『왕권과 교황권』(Tractatus de potestate regia et papali, 1303년경)에서 자연의 상태를 전제하였고, 원시인들이 아마도 어떤 특정한 계약을 맺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더 합리적인 동료들로부터 공동의 법률 아래 함께 살 것을 권유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에지디오(Egidio Romano)는 13세기에 정치적 사회의 기초에 대한 가능한 설명들 중 하나로 계약이론을 제안하였다. 16세기에 마리아나(Juan de Mariana)와 함께 이 이론은 명료화되었다. 같은 세기에 도미니코회의 비토리아의 프란시스코(Francisco de Vitoria)는 게약이론을 암시하였으며, 예수회의 몰리나(Luis de Molina) 역시 그 이론의 대단히 명료한 진술을 하지는 못했지만 비토리아를 계승하였다. 그래서 사회계약이론의 전통은 점점 성장하였다.




-Frederick Charles Copleston 지음. 이남원 정용수 옮김. 《후기스콜라 철학과 르네상스 철학》 456-4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