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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디 북스에 등록된 전자책 버전 <소설과 소설가>(오르한 파묵, 이난아 역, <소설과 소설가>, 민음사, 2018(전자책출간년도))를 바탕으로 페이지를 표기했다. 사용한 기기는 스마트폰이며 종이책 버전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먼저 개관적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오르한 파묵은 실러가 말한 소설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 즉 '순진한(naive)' 관점과 '성찰적인(sentimentalisch)' 관점을 언급하며 강연을 이끌어간다. 순진한 관점은 허구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인 것처럼 믿는 관점이다. 반면, 성찰적인 관점은 소설 속의 모든 것이 작가에 의해 배치된 장치라는 사실을, 요컨대 소설이란 하나의 형식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관점이다. 이것은 물론 독자에게만 한정되는 관점의 대립이 아니며, 파묵에 따르면 작가 역시 대체적으로 '순진한' 작가와 '성찰적인' 작가로 유형이 나누어지는 편이다.
파묵은 이 두 관점 중 어느 하나가 일방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전적으로 '소박한' 독자도 전적으로 '성찰적인' 독자도 소설 읽기의 진정한 즐거움에서는 벗어나 있다(p.118). 우리는 소설 속에서의 체험이 사실은 장치화의 결과라는 것을 인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체험은 어느 정도 진실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요컨대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체험과 사적인 영감들은 '진짜 삶의 경험(p.110)'이며, 그것은 저자의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에서는 진실한 것이다. 이 진정한 삶의 경험은 파묵이 '작가의 서명(p.94)'이라는 용어로 부르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작가의 존재를 '전적으로'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우리가 '가끔' 작가의 존재를 잊을 수는 있는데,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 가능한 개념은 '몰입(p.102)'이다. 파묵은 '소설 표면에 있는 복잡한 풍경 가운데 깊숙이 내재된 의미를 찾고, 주인공들의 감각적인 경험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낄 때 작가의 존재를 잊을 수 있(p.102)'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몰입이란 그 이상이며, 그것은 모더니즘 평론가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시간의 부재로서의 순간'이다. 우리가 '소설은 곧 형식적 구성물'이라는 미학적 사실을 알고 있을지라도, 때때로 그것은 우리에게 완전히 진실하고 명백한 것, 어떤 의미로는 영원하며 불멸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파묵은 이 '깊숙이 내재된 의미'를 '중심부'라는 용어로 표현하는데, 이와 유사한 표현은 문예비평의 역사에서 쉬이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뮈토스의 일관성'이라고 부른 것에서 드러나야만하는 구성적 깊이, 혹은 블랑쇼의 용어를 따라 '오르페우스의 시선'이라고 표현가능한 것. 이것이 파묵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부'의 의미일 것이다.
이상은 첫 번째와 두 번째 강연의 내용이다. 다음으로 네 번째 강연의 경우, 파묵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스타일을 대조하며 강연을 시작한다. 파묵은 '풍경'과 '내면성(파묵의 표현은 '주인공들의 생각과 감각')'의 관점에서 소설을 이야기하는데, 예컨대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에는 내면성이 풍경에 비해 훨씬 더 강조되어 있다(도스토옙스키가 우리에게 주는 지식이나 지혜는... '단어적인' 것입니다(p.183)). 반대로 '톨스토이가 주는 지식은 대부분 시각적인 것'(p.184)이다. 하지만 파묵에 따르면 소설은 근본적으로 시각적 문학이며(p.190), 소설은 읽기든 쓰기든 '단어로 그림을 그리(p.192)'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는 헨리 제임스('제임스는... 자신의 서문과 비평에서 '파노라마', '그림', '화가' 같은 표현을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또는 은유로 계속 사용한 작가입니다(p.233))나 프루스트('나의 소설은 그림이다'(p.234))의 예시를 들며 소설이 시각적 예술임을 강조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서 다소 상반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여기서 노스럽 프라이의 형식주의적 비평을 인용하자면, ‘기술적인(descriptive)’ 특징이 두드러지는 모더니즘 문학-아이러니의 문학-에 한해서만 시공간적 파노라마의 개념이 중대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풍경에 비해 내면성이 강조되는 작품을 써내는 작가들을 많으며, 특히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작가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기 때문이다.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존 맥스웰 쿳시의 경우, 그의 대표작인 <추락>에서는 꼭 필요한 것 이상의 묘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전적으로 내면성에 집중하고 있으며, 최소한의 묘사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몰입의 순간('중심부')은 더 강렬하고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는다. 파묵 자신도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풍경이라는 계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며,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하는 것처럼, 풍경을 강조하느냐 내면성을 강조하느냐는 어디까지나 스타일의 차이일 뿐이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시각적인 문학이 아니라 시각적일 수도 있는 문학의 장르다.
마지막 여섯 번째 장은 '중심부'의 개념에 관한 것이다. 파묵에 따르면 '중심부는 삶에 관한 심오한 관점, 일종의 통찰(p.313)'이다. 중심부는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장소와 형태가 바뀌(p.318)'기도 하는 것이며, 소설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소설 읽기는 진짜 중심부와 진짜 주제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작업(p.319)'이라는 것이다. 파묵이 대표적인 예시로 드는 작품은 허먼 멜빌의 작품인 <모비딕>과 그에 대한 보르헤스의 비평인데, '<모비딕>처럼 어떤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줄거리와 중심부가 서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그 소설의 탁월함과 심오함의 표시(p.321)'이다. <모비딕>의 위대함은 이야기의 줄거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가 이루는 소설적 깊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일관되게 소설의 중심부는 적절하게(지나치지 않게) 숨겨져 있어야 하며, 그러므로 그것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깊이 있고 성찰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파묵에게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은, 장르소설에 대한 그의 얕잡아보는 시선이다. '몇몇 악마적 영혼을 가진 창조적인 작가들의 소설을 제외하고, 장르 소설을 읽을 때는 중심부를 찾는 스릴과 호기심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p.320)'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그가 정말로 옳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문단 문학에서만 중심부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틀렸으며, 모든 종류의 소설은 고유한 형식적 깊이와 은밀한 중심부를 감추어두고 있다. 특히 나는 오늘날의 웹소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욕망이 과거의 위대한 고전보다 훨씬 중층적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웹소설이 동시대적 장르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고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순수하게 미학적이며 거리를 두는 태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측면에서 <소설과 소설가>를 되돌아본다면, 소설에 대한 취향에 있어 나와 파묵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파묵의 열정적인 독자는 아니며 <내 마음의 낯섦> 한 권만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사실 그 소설도 그다지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감상할 때의 태도에 있어, '순진한' 계기와 '성찰적인' 계기가 모두 중요하다는 의견은 극히 공감이 간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예술 작품이 기교적으로 창조되는 형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순진한' 태도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열정을 요구한다. 열정이 부재하는 예술가는 예술가로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리디 전자책 뷰어는 사람마다 글자 포인트랑 줄간격 다르게 설정할 수 있어서 페이지 수 의미 없지 않냐?
그렇긴 한데 (1) 어쨌든 레퍼런스를 제대로 달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이랑 (2) 나중에 휴대폰으로 다시 볼 때 위치를 기억하는 거 때문에 전자책 리뷰 쓸 때도 대충은 페이지를 달아두는 편
독갤 념글 읽는 게 독서 1권 한 거랑 비슷하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군 나도 이 책 읽은 걸로 쳐야지 ㅎㅎ 잘 읽었다 재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