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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작가와 시대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로부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인버스>의 저자인 단요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소설가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2020년대의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벌써 말하기에는 다소 성급한 예측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요컨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에 위치하고 있다.
널리 퍼진 인상 비평의 내용을 따르자면, 오늘날 젊은 한국 작가들은 근본적으로 사소설을 쓰고 있으며, 표현적인 리얼리티에만 소설 쓰기의 역량 대부분을 쏟아내는 중이다. 따라서 그들의 소설은 내면성에 있어서 섬세하고 깊이 있는 지점을, 요컨대 일상의 미시적인 권력관계와 충돌이 '소설적으로' 되는 순간을 건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보다 거시적인 구조와 통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영영 손을 놓아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요점이 살짝 어긋나 있는 비평이며, 한국의 모든 젊은 작가들이 사소설을 쓰고 있지는 않다. 한국에는 리얼리티와 표현성을(약간 다른 용어를 쓰자면 '풍경'과 '내면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작가들이 있으며, 표현적 터치가 가미된 리얼리즘 소설 혹은 맥시멀리즘 소설도 가끔씩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경향성을 논함에 있어 한국 문학의 2010년대는 '사소설의 시대'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는 단지 소설 창작의 영역에서만 전개되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비평가들의 옹호 - 특히 20대 여성의 문학 소비를 강조한 여성주의 비평가들의 옹호- 위에서 전개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2010년대의 작가와 비평가들은 기존 '참여문학'이 거시적 삶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던 경향성에 저항하고, 일상 및 순간의 힘을 복권시켜 그것을 하나의 문학적 범례로써 정립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사소설의 시대가 모든 독자들을 만족시켜주지는 못했다. 202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의 현대문학 독자들은 사소설적 경향성에 대해 피로감을 표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특히 세속적인 계기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오늘날의 '문예창작과' 시스템은 완전히 무능하며, 보다 리얼리티에 치중한 소설들에서 깊이를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는 비평이 득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현듯 등장한 단요의 소설은 세속적 계기와 종교적 계기에 있어 놀라울 만큼 훌륭한 균형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소설은 소설이 지나치게 내면성에만 치중한 나머지 하나의 종교적 문제로 흘러가버리거나, 혹은 세속적인 리얼리티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해 소설로서의 깊이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두 계기 사이의 균형감각은 특히 2010년대 후반기로 오면서 점점 더 많은 작가들에게 중요한 것이 되어 왔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단요가 한국문학의 변곡점에 위치한 작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1. 줄거리와 테마
그러면 이제 작품 그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보자. 간단하게 말해 <인버스>는 해외선물 시장에서 7억 5천만 원과 함께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 금융시장을 통해 자기 인생의 문제로부터 해방된 23세 개인투자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으레 띠기 마련인 세속적 성공과 '대박'의 색채로부터 테마는 살짝 벗어나 있다. 오히려 소설은 가장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시에 종교적 계기에 몰두하며, 냉정한 전업투자자의 언어로 묘사되는 금융시장의 풍경과 주인공의 종교적 내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의문이자 딜레마는 이런 것이다: '해외선물이 주식과 달리 명백한 제로섬 게임이라면, 그래서 내 성공이 직접적으로 누군가의 실패를 짓밟고 서는 거라면, 그렇다면 나는 내 성공에 대해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가?' 이 의문에 대해서 작중의 주인공은 답을 내리는 대신 일종의 '판단중지'를 요청한다: '나한테는 슬퍼하거나 비참해할 자격이 없다. 패배하면 망가진 잔고와 함께 증발하고, 승리하면 살아남아 모든 것을 누린다. 돈과 욕망의 세계에서는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다.'
이 판단중지는 주인공에게 반드시 필요한 태도였을 것이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보았을 때 딜레마는 근본적으로 공허하며, 모순은 인간을 어떤 가치 있는 결론으로도 이끌어가지 못한다. 따라서 개인투자자로서 주인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물 시장의 냉혹한 현실로부터는 눈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개인에게 주어진 몫은 그저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전부이며, 작중에서 언급되는 트럼프처럼 한 마디의 트윗으로 나스닥 지수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은 '인생'의 몫이 아니다. 주인공에게는 가망 없는 사업에 물쓰듯이 돈을 밀어넣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기술번역 일에 매달리다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가 있다.
그러나 개인의 몫이 아닌 것에 대해 판단을 유보했다고 해도, 금융시장의 막대한 힘과 권세가 낳는 딜레마는 주인공의 주변을 계속해서 어른거린다. '공업용 코팅제'를 사와 회사에 납품하는 사소한 사업을 하는 아버지는, 주인공이 쉽게 말하는 국제유가의 폭락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일을 하고 있다. '섭리와운명'이라는 닉네임으로 등장한 자영업자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연락이 뚝 끊기는데, 다른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코로나 사태란 '코로나 테마주'를 찾아봐야만 하는 사건일 뿐이다. 금융은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하지만 동시에 형체가 없기 때문에 부재와 동시에 실재한다. 마치 그림자처럼 우리의 삶 언저리를 맴도는 금융으로부터 주인공은 간신히 고개를 돌릴 뿐이다. 아래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속으로 다짐하는 내용이다.
'나는 순간적인 이미지를 마취약으로 삼는 것이 나의 최선임을 알았고, 내가 밟아 오른 불행들과 앞으로의 악덕을 찰나의 구원 속에 감췄다. 나는 영원히 평안하게, 행복하게, 조용하게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살 것이다. 거기에서 명분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 욕망이,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세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에 대해서라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이 다짐은 분명한 여운을 남기면서 동시에 그 아래에 깔려 있는 거짓을 폭로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는 말은 사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성공에 대해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남은 몇 안되는 신적인 힘이 된 금융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개인으로서 우리는 그로부터 시선을 돌리거나 혹은 단순히 긍정해버릴 수 없다.
2. 물신숭배에 대하여
금융의 속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2장이 다소간 고전적인 관점에 근거해 있음을 미리 설명해두고자 한다. 내가 금융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한결같이 마르크스주의의 언어에 기대어 있다. 그리고 위르겐 하버마스나 가라타니 고진 역시 그렇게 판단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초월론적 비평이지 그 운영방식에 대한 구체적 과학적 기술(description)이 아니다. 물론 이런 판단에 대해 이견을 제시할 마르크스주의자들 - 특히 '실증적' 마르크스주의자들 - 이 많이 있겠지만, 하여간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경제학적이고 과학적인 체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적 논평에 가깝다고 믿는다. 이 감상문의 '물신숭배' 부분 역시 우리의 문화와 제도를 사변적으로 읽어내는 한 가지 방식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물신숭배의 개념은 '구체적 유용 노동'이 '추상적 인간 노동'으로 전환될 때, 그 추상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 그 자신에 대한 망각을 뜻했다. 이에 따라 노동의 산출물인 자본은 오히려 노동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되었으며, 인간이 자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이 무한한 자기증식을 거쳐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가는 와중에, 인간은 소진되며 점점 더 소외당한 존재가 되어 갔다. 이때 마르크스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에 동의하는 하에서만 타당하며, 효용가치론의 시대에는 설 자리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요점은 노동가치론에 동의하느냐 아니면 효용가치론이 진정으로 옳은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마르크스주의의 물신숭배 개념과 노동가치론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마 돈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순수한 형태로 축적되는 권력이란 사실엔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 기술문명이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돈이 인간적인 애정이나 명문대 졸업장을 사주지 못하는 까닭은, 아직까지 문명의 기술력이 '인간성'과 '트랜스휴머니즘'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이 예시가 다소 지엽적이라 느껴진다면, 돈으로 영생을 살 순 없다는 것을 기억해보면 좋겠다). 돈은 그게 현재의 기술력으로 달성가능하다는 조건에 한해서,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는 힘이다.
마르크스도 이미 인정하고 있는 바, 축적된 자본이 갖는 힘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다. 그리고 금융자본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물신의 이름은 이제 금융이 되었다. 금융에 대한 이야기가 동시에 가장 종교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까닭은, 현대 금융이 하나의 세속 종교로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시대와 제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리바이어던'으로서의 근대국가가 하느님의 나라를 세속화한 결과물이었던 것처럼, 금융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21세기의 자본은 모든 가치를 단 하나의 기준('수익') 아래에 종속시키는 유일신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지난한 논쟁을 환기한다면 20세기의 주요했던 지적 논쟁, 즉 결단주의 대 자유주의의 논쟁을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칼 슈미트를 비롯한 결단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제도에 대해 가장 심려했던 부분은 인간 외부적 제도가 점점 더 인간을 종속시켜가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금융은 명백하게 인간 외부적 제도이자 형체 없는 신으로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사회보험이나 국민연금과 같은 제도에 종속되며, 한 인간의 삶은 동시에 금융적 삶으로 환원될 수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청약통장이 곧 시민권'이라는 말과 같은 농담도 아주 익숙하게 사용한다. 종교의 의미가 우리의 삶을 설명하고 의미를 규정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하는 데 있다면, 오늘날 금융보다 더 강력한 종교는 없거나 국가 뿐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3. 재물과 희망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마태 6,24
'우리는 희망을 지향하도록 구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하겠습니까?' - 로마 8,24
위에 상술해둔 것처럼, 소설의 깊이는 금융에 내재된 세속적 계기와 종교적 계기를 동시에 드러내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소설은 세속과 종교 양자 사이를 단순히 대조시켜 보이고 있지는 않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달리, 소설의 매혹적인 복잡성은 미묘하게 뒤틀려 있는 하느님과 재물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다.
유럽 세계의 세속화에 대해 '하느님의 나라를 지상의 나라에 재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럼에도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대한 차이는 희망이 얼마나 견고하며 실재적인가 하는 문제다. 정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지상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힘과 권세를 상징하며, 반대로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따르는 희망을 상징해 왔다. 예컨대 이반 카라마조프의 <대심문관>에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희망의 대변자로, 대심문관은 보이는 세계와 권력의 대변자로 등장했던 것이다. <대심문관>의 그리스도는 말이 아니라 미소와 입맞춤으로써 말하는 반면에, 대심문관은 장대한 논리와 언변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의 가치를 말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신의 통치를 지상화한 것으로 근대국가를 묘사한 이래, 특히 유럽의 담론에서 국가는 곧 '보이는 신'의 지위를 누려왔다.
금융자본주의의 통치가 역사적인 '지상의 나라'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명백한 실재 혹은 실재에 가까운 것으로서 인구를 통치하는 것과 대비되게도, 금융의 통치는 지나치게 거대하기 때문에 우리가 형식적으로 사유해낼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해 있다. 물론 경영학의 '투자론' 혹은 '금융경제학'과 같은 영역은 금융에 대한 언어를 우리에게 제공하긴 하지만, 어떤 인간도 부분이 아닌 총체로서의 금융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파악하지 못한다(고백건대 나는 효율적 시장 가설이 대체로 옳다고 믿는 편이다).
여기서 공정을 기하기 위해 언급하자면, 물론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국가에도 '통치의 비밀(arcana imperi)'에 해당하는 영역은 있으며 이해의 부재를 요구하는 영역 역시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국가와 금융이라는 두 체제가 얼마나 본질적으로 모호한가 하는 것이다. 국가가 비밀에 의해서 유지되는 영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국가는 국민에게 진실해야 하며 또한 공식적인 서류와 명령의 존재를 통해 유지되어야만 한다. 반대로 금융은 마치 칸트의 숭고 개념에서처럼, 일종의 몰형식적 형식이며 오로지 규제적인 것 혹은 초월적인 것으로만 우리에게 나타난다.
한편으로 금융은 그 초역사성과 영속성에 의해 지상의 나라와 구별된다. 그것은 마치 초역사적 실체를 가진 존재처럼 전지구적 통치를 하나의 거대한 체계 아래에 묶는다. 국민연금에 가입된 대한민국 국민은 그로 인해 동시에 지구 반대편의 기업들과 연결되어 있다. 리스크를 완화시키기 위한 금융의 장치들은 국제적 경제가 하나의 통일체처럼 작동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사실 보이는 희망 대 보이지 않는 희망의 대조보다도 더욱 중대한 차이다. 지상의 나라에 대한 담론에서 국가는 그것이 아무리 개별적이고 고유한 것이라도 근본적으로는 몰락해야만 할 운명에 있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즉 영원한 것이며 처음과 끝이 없는 하느님의 나라와 대비되게도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중의 주인공이 언급한 바와 같이, 시장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점에서 '스포츠 경기'와도 지상의 나라와도 다르다. 금융자본주의는 현대의 체제가 영속적이며 초역사적이라는 기대 위에서 건설되어 있으며 또한 그 기대에 의해 생명력을 획득한다.
따라서 소설 <인버스> 속의 금융은 세속적이면서도 동시에 종교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7억 5천만원의 최종적인 평가 금액과 함께 선물 시장에서 손을 털고 나온 주인공은 그것을 일종의 종교적 구원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구원은 사실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구원이다. 금융에 의한 통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상에서의 구원을 손에 넣은 것이다.
이처럼 물신의 힘이 세속적이면서도 동시에 종교적인 것으로 작동하는 과정의 묘사는 소설적으로 흥미롭다. 다만 주인공은 결말부분에 이르러 급진적 종말론에 가까운 상상을 하는데, 그녀는 거대한 거인이 단숨에 지구를 손에 쥐어 지상의 모든 것을 으스러뜨리는 장면을 꿈꾼다. 이 급진적 종말에 대한 꿈은 소설의 복합적인 층위 위에 마지막 포인트 하나를 더해준다. 영속적인 것으로서 신의 자리를 온전히 대체해버린 금융조차도 본래적인 의미에서는 찰나의 꿈에 불과한 것이다.
4. 지상에서의 삶
마지막 장을 시작하기 전에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보자. 놀랍게도 주인공이 거인에 의한 세상의 종말을 꿈꾸는 장면 다음에는 카페에서 3만 3천원짜리 디저트 세트를 사먹는 꿈이 이어진다. 이것은 소설의 종말론적 향취를 단순한 종말론으로 남겨두진 않겠다는 작가의 의도로 추정되는데, 금융자본주의가 아무리 세속적인 것이며 언젠가는 종말에 이를 것이든 그것은 쉬이 극복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금융자본주의의 최종적인 실패는 인류의 죽음 혹은 인류의 우주 정복 시대에나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금융자본주의가 불안정하며 곧바로 극복될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자연재해와 기후변화가 우리 시대의 거인이 되어 신들의 종말을 가져다주리라 믿는 사람 역시 있다. 그러나 어쨌거나 지금으로서 우리의 세계와 체제는 영속적이며 견고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역사의 종말 테제'가 널리 받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이 일부 타당하다고 말하는 많은 학자들을 생각해보라). 금융이 정말로 초역사적인 실체로서 혹은 '그렇게 기대받는 체계로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지도 순전히 긍정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있다면, 지상에서의 삶은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해야만 하는가?
만약에 우리가 전 지구적 금융의 작동에 대해 너무 오래 고민하고, 제1세계 시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하게 윤리적인 삶이 자살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우울하고 비관적인 결론이 될 것이다(나는 여기서 마크 피셔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최근에는 '자본주의에 대안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오래 몰두해 있었는데, 그 대답은 뚜렷한 대안이 있다면 이미 세상에는 낙원이 도래했으리라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에게 있어 종말은 사회주의 혁명의 도래였다. 그보다 덜 유물론적인 기독교인들에게 종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뜻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사회주의의 건설' 혹은 2천년 동안 집을 나간 주인의 귀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실사회주의는 많은 경우 단지 자본주의적 강제성을 사회주의적 강제성으로 대체하는 결과를 보여주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마도 시간적 역사 속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을 사건으로는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기대 혹은 주장은 사실상 현실 앞에서 곧바로 무력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노조를 비롯한 집단적 투쟁 역시 과거와는 그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 적어도 제1세계 국가에 있어 노동운동은 이전처럼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비전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운동의 방향은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이익의 증대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변해갔으며 이것은 세상이 '먹고 살만해' 지면서 당연하게 수반된 변화였다.
물론 나는 오늘날 집단적 투쟁이나 활동이 모두 무의미해졌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더 나은 제도를 건설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여전히 숭고하며 그런 사람들 덕에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든 집단으로서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막스 베버가 '쇠우리'에 대해서 말한 바로 그 시대, 소명으로서의 학문조차도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영혼 없는'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그리고 그 시대는 '역사의 종언 테제'에서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최선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결코 악하거나 최악인 체제가 아니며 단지 어느 정도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체제일 뿐이다.
그럼 지상에서의 삶은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그것에 남은 어떤 뚜렷한 의미 혹은 거시적인 가치는 있는가? 아니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가능성은 금융자본주의의 질서에 순응하고,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돌보며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는 것뿐인가? 이에 대한 답은 결국 주인공의 말처럼 '아무도 모른다'가 될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삶이 곧 구원을 의미했다는 고전적인 윤리마저도 오늘날 금융의 지배에 대항하기에는 미약해보인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 말하자면,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지만 동시에 행복을 믿어야만 한다는 주인공의 답만이 유일한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우리가 행복의 의미와 고귀함을 믿지 않기로 한다면, 그 순간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대안은 죽음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개추
가둬놓고 평론만 쓰게 만들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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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2020년대 문학은 어떻게 기록될까 궁금했는데 이런 글은 환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