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16f2cad3623b55ba2ff5a51d65dc7c0fc432553092b733af73f8fc2a2bf4e

오늘은 동지입니다.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바람도 세차게 불어 온몸이 얼어붙는 줄 알았습니다.

밤도 유달리 깁니다.

선생님께서 가신 나라에서는

차가운 눈도 아니 내리고,

칼날같은 고추바람도 아니 불겠지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역시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시대는 한겨울밤이었습니다.

광기 넘치던 제국의 식민지에서 태어나시었고,

자라서는 수많은 탄식과 슬픔을 안긴 전쟁도 겪으셨습니다.

참주와 그의 부하들은 권력을 위하여 무고한 이들에게 누명을 씌웠고,

선생님도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떠나신 이 날에는

지구에 역병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사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만이 할 수 있던 일을 해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헬라스어와 라티움어를 익히시고,

한국인에게 매우 생소했던 헬라스-로마 고전을

중역이 아닌 원전 번역으로 우리에게 소개해주셨습니다.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아이소포스,

헤로도토스, 투퀴디데스, 크세노폰,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키케로......

우리가 이 사람들의 작품을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선생님의 굳건한 사명과 헤아릴 수 없는 노고 덕분입니다.


어두컴컴한 밤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 모릅니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헤매는 우리는 그 해답을 책에서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홀로 걸어가지 않습니다.

먼저 간 사람의 발자국을 보기도 하고,

옆에 있는 동무와 서로를 부축하며 나아가기도 합니다.

이토록 광대하고 다양한 세계에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답이 나올 수 있지만, '사랑'과 '초월'도 그 답안 중 하나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해내신 번역도 그렇습니다.

시대와 민족, 언어 등의 장벽을 초월하여,

원전의 언어와 배경을 전혀 모르는 우리 독자에게

그 감동과 의미를 공유해주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번역해주신 고전은

우리에게 영혼의 지도와 나침반이 되어주었습니다.


천병희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결코 침침한 망각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호메로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한국어로 읽을 때마다

오비디우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한국어로 읽을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이야기들의 의미를 어떻게 해야

더 수월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선생님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천병희 선생님.

고이 쉬시소서.

냉풍도 없고

참주도 없고

감옥도 없는

그곳에서,

언제나 따뜻한 햇빛만 내리쬐는

상춘(常春)의 축복받은 평원에서

한가로이 노니시며 쉬시소서.


독서 마이너 갤러리 운영진 일동

삼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