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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은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며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지옥과 같은 삶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해낸 실존하는 위버멘쉬의 표상이다.


자신이 겪었던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바탕으로 삶의 공허와 무의미함에 지친 현대인들을 보듬고 삶의 의미를 찾는 조언자로서 실존적 공허를 타파하게 하는 로고테라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빅터 프랭클을 설명하기 위해서 로고테라피를 떼어놓을 순 없다. 그것에 그의 깊은 인생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로고테라피의 인간에 대한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실존적 공허 앞에 자유 의지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삶의 의미를 가진 존재로 나타낼 수 있다.


실존적 공허는 삶의 무의미함과 공허함에 고통받는 상태를 일컫는다. 인간의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환원론적 입장에 의해 인간 개체의 의지는 희미해지고 보다 보편적인 과학적 설명 앞에 인간은 발가벗은 원숭이같은 모습으로 전락한다. 인간은 물화되어 단순한 객체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들어 인간은 무릇 이래야만 한다 라는 가치관이 무너짐으로써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런 상황들은 인간을 삶의 무게에 짓눌리게 한다.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자유의지는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와 관련된다. 한 인간은 외부상황과 세계의 근저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힘을 막아낼 능력이 없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이 발생하고 그 거대한 힘 앞에 왜소한 한 인간이 홀로 덩그러니 놓인다. 하지만 그 왜소한 이미지는 실제로는 더 왜소해질 수도 반대로 위대하게 빛날 수도 있다.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무너져 내릴 것인가 버티고 뛰어넘을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인간에게 달린 자유의지다.


빅터 프랭클은 의사로서 많은 조건들이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런것들을 감안해도 그는 자유의지를 인간 전면에 내세우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자유의지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빅터 프랭클의 과제는 의지를 지니지 못한 프로그램화된 어떤 하나의 물체으로 전락해버리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불우한 자들을 다시 인간의 자리로 격상시켜야 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로고테라피에서도 환자를 신경증을 앓고있는 단순 환자로 보기보단 인간의 의미를 되찾아주기 위해 환자의 인간성을 강조하고, '너와 나'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이런 과제를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쾌락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초월하여 인생에 있어 적합한 의미를 찾으려는 존재다.


모든 사람은 서로 각기 다른 판단력과 개성을 지니지만, 빅터 프랭클은 특이하게도 삶의 의미가 사람에 의해 정해지는 것을 거부한다. 이렇게 진술되어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삶의 의미가 타인에 의해 정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일무이한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내야만 한다는 빅터 프랭클의 입장은 완고하다. 그저 그는 조력자로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울 뿐이다.


삶의 의미는 우리에게 발견되어야 하는 무언가이다. 인간은 각자 가지고 있는 고유한 판단력과 개성에 따라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고, 찾아낸 삶의 의미를 실천하며 살아가는데 인생의 목적이 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태도가 있는데 바로 궁극적인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과 신뢰다. 의미라는 것은 유형의 존재가 아니며 감각을 통해 느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해 기도를 올릴 순 있다.


무신론자 입장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 직관적으로 와닿지는 않지만 내가 믿고 있는 신념으로 치환한다면 그럭저럭 이해할만하다.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야만 우리는 그 의미에 대한 믿음을 지속할 수 있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길 수 있다.


내가 수용소 문학을 좋아하는 것은 불우한 군생활을 돌이키게 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억압당한 불우한 영혼앞에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 특유의 개같음이란!
  
나는 수용소 문학을 읽으며 고통을 곱씹곤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군생활의 가장 큰 의미는 자유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것에 있다.


고작 군대 1년 x개월에도 번뇌하고 삶의 무게를 전부 짊어진 것마냥 고난을 겪는 예수코스프레를 하며 괴로워하던 나의 모습은 우습기 짝이 없다. 그렇다한들 그 시간 속에서 제일 괴롭고 고뇌했던 나란 존재는 과거의 기억 속에 그대로 냉동인간처럼 보존되어 있다. 군생활 속에서 나는 많은 실수도 했지만 많은 의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군생활은 나와 사회의 싸움이자 자유와 억압의 싸움이기도 하고 나와 타인의 관계에 관한 줄다리기이기도 했다. 때로는 자유를 과하게 억압하는 간부를 상대로 불행한 영혼들을 모아 정신적 반란의 수괴가 되기도 하고 지랄병싸는 선임을 골리며 즐거워하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결말은 썩 좋지 못했다.) 그것이 내가 군생활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다. 자유를 향한 나름의 파닥거림!


수용소에서 수많은 동료들이 그리고 가족들이 죽어가는 것을 본 빅터 프랭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런 지옥도 속에서도 자신과 주변인물들을 통찰하고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필사적으로 탐색하려했던 비쩍 마르고 빡빡 깎인 머리에 다 헤진 누더기를 걸친 빅터 프랭클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나는 피로 쓰여진 책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빅터 프랭클의 저서야말로 피로 써내려간 삶에 대한 공허로 고통받는 인간들에 대한 위대한 치료법이고, 빅터 프랭클은 피바다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모색했던 그리고 그 삶의 의미를 실천한 위대한 인간이다.

-ㅇㅇ(112.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