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갤에서 추천받았던 을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책의 상태도 도서관 책답지 않게 깨끗해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제 행복했던 기분은 급반전되었습니다.
네, 밑줄이었습니다.
전 모든 밑줄을 혐오하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중고책을 사 읽을 때
(물론 구매전에 밑줄과 코딱지 테러를 피하기 위해 전 페이지를 훑어보는 탓도 있지만)
속지 앞에 쓰여진 아마 선물용으로 구입하며 적었을 것이 분명한 친필 메시지나
(그런 깊은 의미로 선물받은 책을 헌책방에 팔아넘긴 행동, 그렇게 실패한 책을 선물한 사람의 선의 같은 것을 생각하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집니다)
의외의 문장에 '연필'로 그어진 밑줄엔 부끄럽지만 조금 흥분하기도 합니다.
특히 얼마 전 <카운슬러>를 중고로 사 읽을 때,
[진실에 온도 따윈 없어]라는 문장에 그어진 밑줄을 보고
'내 이전의 독자는 왜 이 문장에 밑줄을 그어 놓은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루 종일 한 적도 있습니다.
전 그의 밑줄에 불쾌했다기보단,
오히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카운슬러>라는 작품,
나아가 코맥 매카시의 작품 세계의 전체를 대변할만한 문장에 밑줄을 그은
그의 식견에 감탄하기 조차 했습니다.
이런 밑줄은 오히려 나중에 읽을 사람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는 동시에
말 한마디, 심지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다른 독자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전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저 문장에 밑줄을 그은 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저만큼 매카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중고책으로 팔았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책을 아끼는 독자이며 (책의 나머지 부분이 절대적으로 깨끗한 것이 이것을 의미하죠)
다른 작품처럼 한없이 불친절한, 게다가 시나리오 방식으로 쓰인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지 않을 정도의 식견을 갖춘 (남발되지 않고 딱 그 문장에만 그어진 밑줄!) 사람임과 동시에,
책의 밑줄은 되도록 볼펜이 아닌 연필을 써서 그어야 한다는 기본적 예의까지 갖춘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 심지어 연필로 그어진 저 밑줄을 지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 밑줄을 그은 인간탈을 쓰고 다닐 그 금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습니다.
한 페이지 안에 최소한 10군데 이상에 밑줄을 그었고,
모두 검은 색 볼펜으로 그었으며, 밑줄이 그어진 단어나 문장엔 아무런 의미적 중요성도, 공통점도 없었습니다.
전 처음에는 아마도 연도나 이름같은 고유명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멍청이의 바보짓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밑줄은 연도나 고유명사 외에도 별다른 의미없는 부사, 형용사 관용구 등
온갖 쓸데없는 부분에도 남용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가 이 책에 밑줄을 그은 것은
자신의 짧은 기억력이나 난독증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아닌
타인과 공공도덕에 대한 무신경함과 몰염치의 결과물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성으론 '포조 브라니촐리'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남은 제
감성으론 온전히 그를 저주해야 했던 독서는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이름모를 그에 대한 심연과도 같은 분노는
책을 대출하는 수고를 자동대출기에 맞겨둔 채,
권당 몇 초도 걸리지 않을 책 훼손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 도서관 직원,
자동대출기를 구입해달라고 건의한 교육부 산하 모 공공 도서관의 직원,
그걸 좋다고 받아들여 (아마도) 수십억에 달했을 관련 기계와 프로그램을 세금으로 구매하고 마련하여
평범한 도서관 이용자의 독서를 방해한 정부에까지 다다랐습니다.
동시에 저는 딴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아득바득 책을 읽는 주제에
이런 사소한 일 하나 넘어가지 못하고 맹렬히 분노하는 제 내면의 협소함에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딴 건 다 필요없이 저는 그 책에 밑줄을 그은 자를 저주하길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놀라운 방식으로 제 저주는 발설되기도 전에 이미 이뤄졌다는 것을 어느새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밑줄은 앞 부분의 100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찬양하라, 책의 신이여!
도서관의 여신, 알렉산드로스의 히피티야여!!
자신의 현현을 업신여기며 불경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물론,
공공의 자산으로 마련한 도서관의 책에 밑줄을 긋는 자들에게는
절대 자신을 끝까지 완독할 수 없는 저주를 주셨나니!
연필, 볼펜, 형광펜 기타 등등으로 발악해보아야
'바닷가재가 달에 다가갈 수 없듯'
그대들도 결코 책의 의미에 다가설 수 없으리!
흐뭇한 미소를 띄운 채, 저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밑줄 없는 책의 나머지 부분을 행복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목에 분명 책 이름이 적혔는데 내용에는 내용 언급이 1도 없군요
나도 그얘기 할라했는데
책 내용 3번이나 인용했고, 책에 나오는 개그도 활용했는데.. (시무룩..)
독갤다운 밑줄빌런
다 읽으면 짧게나마 서평도 올릴게! 개그+밑줄 경각심을 위한 글이었음!
ㅋㅋㅋㅋㅋㅋㅋㅋ 웃기당
음 그렇군요 책 내용 1도 없는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