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by 교황청 성서위원회
//원문은 불어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영어 번역을 같이 발췌함.
Although the Christian reader is aware that the internal dynamism of the Old Testament finds its goal in Jesus, this is a retrospective perception whose point of departure is not in the text as such, but in the events of the New Testament proclaimed by the apostolic preaching. It cannot be said, therefore, that Jews do not see what has been proclaimed in the text, but that the Christian, in the light of Christ and in the Spirit, discovers in the text an additional meaning that was hidden there.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제21항
The texts speak of typology and of reading in the light of the Spirit (2 Co 3:14-17). These suggest a twofold manner of reading, in its original meaning at the time of writing, and a subsequent interpretation in the light of Christ. In Judaism, re-readings were commonplace. The Old Testament itself points the way. For example, in the episode of the manna, while not denying the original gift, the meaning is deepened to become a symbol of the Word through which God continually nourishes his people (cf. Dt 8:2-3). The Books of Chronicles are a re-reading of the Book of Genesis and the Books of Samuel and Kings. What is specific to the Christian re-reading is that it is done, as we have said, in the light of Christ. This new interpretation does not negate the original meaning. Paul clearly states that “the very words of God were entrusted” to the Israelites (Rm 3:2) and he takes it for granted that these words of God could be read and understood before the coming of Christ.
성경 본문은 예형론과 성령에 비춘 해석에 대해 이야기한다(2코린 3,14-17). 이는 구약을 두 가지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개념을 암시한다. 그 두 차원은, 처음에 인식할 수 있는 것인 본래의 의미라는 차원과 그리스도에 비추어 드러나게 된 그 후의 해석이라는 차원이다. 유다교 안에서는 재해석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구약 자체가 이미 이를 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만나의 일화를 재해석하는데, 여기에서는 본래의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 의미를 심화시켜 만나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먹여 기르시는 그분 말씀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신명 8,2-3 참조) 역대기는 창세기와 사무엘기, 열왕기의 재해석이다. 그리스도교 재해석의 특징은, 앞서 말했듯이 그것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새로운 해석은 본래의 의미를 없애지 않는다.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로마 3,2)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분명히 단언하며,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도 그 예언들은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었고 그렇게 되어야 했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여긴다.
-제1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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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교황청에선 구약의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텍스트 그 자체에선 찾을 수 없는 surplus de sens(잉여 의미, 추가 의미)라고 봄.
다만 이 그리스도론적 surplus de sens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AD 1세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과거를 회고했을 때 발견되는 객관성을 가졌다고 봄.
실제로 이런 독법은 구약 안에서도 발견됨. 가령 출애굽기는, 바빌론 유배 및 귀환 후 역사를 회고한 후, '바빌론 탈출을 암시한다'는 surplus de sens를 구약 안에서 가지게 되었음. 그리고 '이집트 탈출이 바빌론 탈출을 암시한다'는 surplus de sens는 구약 내부 논리에선 객관성을 지님.
내가 이걸 왜 독갤에 소개하냐 하면, 난 이런 해석법이 성경 뿐만 아니라 다른 고전 텍스트에도 적용이 가능하다고 봄. 가령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텍스트 그 자체로는 철저히 고전기 헬라스의 문화의 맥락에 위치함.
대화편에서는
ㄱ. 인간 역사에 개입하는 올림포스 신들
ㄴ. 철학자에게 메시지를 주는 다이몬(신령)의 존재
ㄷ. 꿈에서 받는 신탁
이 당연하게 전제되어 있음. 텍스트 그 자체엔 근대가 없음. 오직 고대 뿐임.
다만 이후의 철학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속해서 다시 읽었고, 이를 중세 철학의 맥락에서, 근대 철학의 맥락에서 회고하고 반추했음. 이는 텍스트 그 자체에서 드러나지 않은 surplus de sens임.
그렇다면 이 surplus de sens는 객관적일까? '객관성'의 의미에 대한 백가쟁명이 따르갰지만, 최소한 고전이 후대에 다시 읽히면서 나온 surplus de sens가 공적 의미를 가질 수는 있다고 봄.
또하나의 예시로 (고전이라 하기엔 근대 텍스트이지만) 애국가를 들 수 있음.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에서 "하느님"이 누구일까?
텍스트 그 자체로 보면 여기엔 이견의 여지가 없음.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임. 애국가의 작사자를 윤치호로 보든, 안창호로 보든, 작사자가 의도한 1차적인 문필적 의도는 분명하게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임. 가장 오래된 악보에서 '하나님'으로 나오는 것도 근거이지만, 애당초 작사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모두 개신교 신자임.
하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텍스트는 이후에 다시 읽히면서 '특정 종교에 한정된 의미가 아니다'라는 surplus de sens를 얻게 되었음. 이걸 객관적 의미라 할 수 있을지는 확언할 수 없어도, 최소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이 surplus de sens는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공적 의미'임.
읽기 귀찮은 사람을 위한 요약
1. 텍스트엔 텍스트 그 자체의 의미와, surplus de sens(잉여 의미, 추가 의미)가 있다.
2. surplus de sens가 공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카톨릭이 이런 면에서 참 좋긴 하네...
참 흥미롭고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개념인듯. - dc App
혹시 님... 좀 외람되긴 했지만... 에른스트 블로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함
안 읽어봤어요 ㅎㅎ
이글 보고 기도하면서 성경 읽고 있다
교황청 권장도서 목록은 없나요
과거 금서목록이 사실상 권장도서 아니노
님 해석학 책이라도 몇 줄 보시는게?
말씀이 어지러워서 잘 모르겠네요 해석학 책 몇 줄 보시면 지금 어렴풋한 생각 좀 정리할 수 있을 듯? 어차피 교황청 하는 얘기도 영향 받고 하는 얘기일 테니
그렇다면 현재를 사는 우리가 할 일은 시대마다 고대의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해왔는지 정보를 수집해보고 그 하나의 텍스트를 둘러싼 여러겹의 나이테처럼 형성된 해석들의 변화과정을 도출해서 이것들이 앞으로 궁극적으로 어떤 해석으로 가려고 하는지 유추해보는 일도 가능하겠내요 - dc App
오 진짜 흥미롭게 잘 읽었음
? 마지막에 가서 차량전복 무엇? 애국가 텍스트만 보면 하느님이 무속의 하늘님인지 기독교 하나님인지 몰라도 작사자와 첫 가사라는 외적 맥락 회고해 보면 후자임을 알 수 있다고 써놓고 거꾸로 예시 드는거 보니 본건 있어도 이해는 못한 모양. 똑똑하다는 소리 듣고싶으면 윗댓 말처럼 해석학 읽고 멍청하다는 소리 듣기싫으면 본인 글이나 다시 읽어보심이?
게다가 애초에 예수가 '구약' 엎으면서 시작된게 그리스도교인데 가톨릭이 구약에서 예수적 의미를 찾기위해 확장해석을 한게 '의외'라고. 좌회전 깜빡이 넣고 좌회전하는 차를 보고 놀라면 운전면허 반납해야지. 구약이라고 쓰면서 그게 왜 '구'약인줄 모르고 가톨릭의 의외성 타령 ㅋㅋㅋㅋ 예수가 떡으로 다섯대 때리고 물고기로 두대 때리겠다
예수는 구약을 엎은 적 없음. 이건 무슨 일부 교단이나 일부 성서학자들의 급진적인 소수설이 아니라,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무교이든 성서학계의 다수 견해임. 당장 복음서만 봐도 예수는 구약의 구체적인 해석을 '어떻게' 할까를 두고 논쟁했지, 엎자고 한 적은 없음.
20세기 후반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도, 예수가 1세기 유다이즘의 맥락에 위치한 유다인이라는 걸 새삼스레 강조하는 쪽으로 공감대가 수렴하고 있음.(소수설이지만 유명한 예외: 존 도미닉 크로산)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바탕으로서 이스라엘의 성경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실제로 찾아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리고 그분을 통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역사役事에 관한 소식을 이해시키기 위해, 거듭 책―이스라엘의 성경―을 자구대로 인용하거나 관련 제재題材들을 들여온다. '율법과 예언서'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 증언을 해석하고 정당화해 주는 지평이다. …… 교회가 이스라엘 성경을 자기 성경의 첫째 부분으로 삼은 것은 강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성경의 문서들은 이론의 여 지 없는 계시 주장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예수 제자들은 자신들의 예수 선포에 범주적 전달 가능성, 설득력,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 문서들을 되잡았다. 신약성경 문서들이 이스라엘 성경에 터하여 쓰였
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성경 독해의 해석학적 단초는 분명해진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 성경(또는 그냥 구약성경)의 빛 안에서 읽혀야 한다. 자주 인용되는 고대 교회의 성서학자요 번역자인 히에로니무스의 말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를, '구약성경을 알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살짝 바꿔 말할 수 있겠다.」 -Erich Zenger 씀, 이종한 옮김, 《구약성경 개론》 22-23쪽
「예수가 제식을 맹렬히 비판하여 성전을 없애려 했고 성전제식을 모두 폐지하기를 원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말은 제식과 전례에 대한 거부감을 예수의 삶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가 한 번도 성전을 방문한 적이 없고(앞의 텍스트 외에 마르 12장 성전에서의 예수의 가르침 참조) '성전 정화'(환전상과 가축 상인들을 몰아냄)는 성전제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헌금이나 기부를 해야 할 거룩한 장소에서 돈을 긁어모으는 행위(가난한 과부의 헌금 대목 참조)를 금지한 것을 그렇게 왜곡한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수가 성전제식을 거부한 모습은 최후만찬 예식에서 극에 달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하느님께 속죄하는 새로운
희생양으로 세우기 위해 빵과 포도주에 대한 말로 성전제식을 폐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제식은 속죄 제물과 속죄의 날(욤 키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런 주석은 전례와 '제식 규정'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유다교 전례에서도,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도 목표가 같은 한 가지 길이 다른 길을 자동적으로 막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두 갈래 길은 서로 나란히 있다. 그리고 두 가지 길을 잘 활용하면 영적으로 유익하다. 유다교에서는 죄의 사함은 기도나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일뿐 아니라, 자선 행위로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므로 대속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 그 자체로 성전의 역할을 없애리라는 뜻으로 여긴다면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히브리서도 예수가 이러한 이유로 대사제직과
하늘나라의 성전을 논증해야 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당연히 성전에 모였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평생 그곳에서 보냈다. 예수가 흘린 피(수많은 성전 제물 대신에)가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다면, 성전제식을 그 피의 상징이나 재현으로 볼 수 있고 본질적인 것의 모사模寫로 인정할 수 있다(히브리서가 말한 대로). 요약하면, 에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히 여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더불어 예수도 성전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심판한다는 말을 성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로 표현했다.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예수는 결코 성전과 제식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 대
부분이 그랬듯이, 예수도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의 징조나 실제 상징으로 본 것이다. ...... 예수가 가시적 제식의 형상인 성인, 성전, 기도, 제물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예식을 거부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복음에는 예수가 제식을 폐지하고 윤리만 내세우는 대목이 없다. 물론 예루살렘이 예수에게 두 얼굴을 보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집이다.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예수는 성전도 당연히 사랑했다.」 -Klaus Berger 씀, 전헌호 옮김, 《예수》 2권 123-125쪽
애국가 예시는 본문 다시 읽어보면 뭔 말인지 알 수 있을 거임.
애국가 작사가로 지목된 사람이 개신교도라는 점에서 원래의 '하느님이 보우하사'에서의 하느님이 기독교 신이라는 건 알겠는데 애국가 쓰일 땐 전통의 하ㄴ°님의 남부 사투리가 하느님이고 북부 사투리가 하나님이라 원문 단어 때문에 개신교로 유추하는 건 의미없다고 알고 있음
개 쓸데 없는 참견이네. ㅈ대로 읽으면 되는 거지 뭔 지침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