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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때 단순 호기심과 지적 허영심을 채우고자 독서를 했었다. 그렇게 한창 읽다가 독서에서 참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허영심만을 채우려는 의도 때문인지 결국 흥미를 잃고 책에 서 손을 뗀지 몇 년 됐다. 그러다 금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즈음인 9월 우연히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한 덕에 다시 독서의 재미를 붙이게 됐다.


2022년 결산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아 놓긴 했지만 사실상 독서한지는 3달 밖에 안 되었다 보니 그렇게 많은책을 읽진 못했다. 그래도 여태까지 읽었던 책들을 되새김질 해볼 겸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집어 보며 본인의 독서기록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1. 픽션들 (Ficciones)


"이미 허구적 과거는 인간의 기억에서 또 다른 과거, 즉 우리가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심지어 거짓인지도알 수 없는 과거를 점령하고 있다."


픽션들에 수록된 단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中


이 책을 알게된 계기는 그렇게 특별하진 않았다. 내가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다 보니 리뷰 컨텐츠에도 이곳저곳 기웃 거렸는데 언젠가 무슨 게임 리뷰 만화를 보다가 마술적 사실주의 (Magical realism) 이라는 예술 사조를 소개하면서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예시로 들길래 궁금해서 찾아봤다. 호기심으로 찾아본 책에 대한 첫인상은 참으로 생경하고,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기까지 해서 굉장히 난해한 책으로 다가왔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한 편당 20 페이지를 넘기는 편이 거의 없었고, 다 합쳐도 230 페이지 남짓되는 많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읽어내는데 2~3 주 정도의 적잖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래도 실존하지도 않았던 존재들이 우리가 알고있는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침투하면서 자아내는 오묘하고 신비한 이야기들은 나를 흠뻑 빠지게 만들었다. 음모론의 형태로 다가오는 가상의 세계관 부터 메타픽션적인 요소들이가미된 서평형식의 소설에다,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몽환적인 이야기들을 몇 페이지 안되는 분량에 오밀조밀하게담아낸 보르헤스의 글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효과가 너무 세다 못해 극약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난이도였지만 한동안 꺼져있던 독서욕에 불을 질러줘 앞으로 더 많은 책을 읽고 싶다는 다짐을 세워준 너무 고마운책이다.


여담으로 픽션들의 수록작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걸 꼽자면 창조주 컴플렉스를 몽환적으로 풀어낸'원형의 폐허들 (Las ruinas circulares)', 보르헤스의 상상력의 결정체인 '바벨의 도서관 (La biblioteca de Babel)',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 (Tema del traidor y del héroe)' 정도가 있다.


2. 변신 • 시골의사 (Die Verwandlung • Ein Landarzt)


"장성이 막아주는 것이 누구란 말인가? 북방 오랑캐들이다. 나는 중국 남동부 출신이다. 남동부서는 북방 오랑캐가 우리를 위협할 리 없다."


변신 • 시골의사에 수록된 단편 만리장성의 축조 때 中


여러가지 판본 중에 민음사 출판본을 읽어봤는데 카프카의 단편 중 가장 잘 알려진 단편 '변신 (Die Verwandlung)' 을 비롯해서 32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 옛날엔 이 중 가장 처음에 수록된 변신만 읽어보고 책을 덮었는데 이번 기회를 빌어 모조리 읽어보았다.


수록된 단편들 중에서는 흔히 말하는 플롯의 필수요소인 기승전결을 모두 갖춘 중편소설부터 거의 단상에 가까운수준의 단편까지 다양한 구성을 갖추었다. 대부분의 단편들 중에서 느껴졌던 테마는 바로 삶을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부조리' 와 이에 휘둘리는 끝에 부조리에 순응하고야 마는 '인간군상' 이였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론 작품 중에마주하는 부조리들은 완전 초자연적이거나 생뚱맞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떤 근거나 제대로 된 해명없이복종과 준법을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 모종의 이유로 효용 가치가 떨어져 끝내 버려지고야 마는 인간상,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삶을 마주한 끝에 다가오는 좌절이나 굴종의식 등 굉장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이렇게 현대적인 모습을 띈 채 다가오는 악몽들은 읽는 이들의 숨을 쥐여오는 듯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고 존재하는지, 또 우리가 알던대로 살아오는 게 과연 합당하고 옳은 길인지 고찰하게만들었는데 이 점이 나한테는 썩 매력적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었던 수록작은 익히 잘 알려진 변신, 기괴한 분위기가 일품인 시골의사 (Ein Landarzt), 인간에게 밀렵되어 버려 인간의 사고양식과 언어를 배운 침팬지가 화자인 이야기  '학술원에의 보고(Ein Bericht für eine Akademie)', 사회 시스템의 비합리성을 다룬 '만리장성의 축조 때 (Beim Bau der chinesischen Mauer)’ 가 있다. 다만 혹시라도 이걸 보고 카프카 단편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민음사판본은 그닥 추천하지 않는 게 해당 판본이 카프카의 간결한 문체랑 달리 지나치게 늘여서 써서 읽기도 힘들 뿐더러 카프카의 또 다른 단편 걸작인 '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 와 '단식 광대 (Ein Hungerkünstler)' 가빠져 있어서 그렇다.


3.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


"내가 어떻게 악마의 소행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기는 하지만 악마가 존재한다는 유일하고확실한 증거는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악마의 소행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그 믿음 때문에 오히려 강화되었을 겁니다."


장미의 이름 中


이탈리아의 저명한 기호학자이자 작가로 활동했던 움베르코 에코 (Umberto Eco) 가 처음으로 집필한 장편 소설이다. 나 보고 여태까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나 이른바 '인생 책' 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할 것이다. 사실 예전에도 한 번 완독한 적이 있지만 읽은 지 오래되기도 해서 이번 기회에 재독해 보았는데 명불허전이었다.


저자가 뛰어난 기호학자이기도 하고 젊은 시절 중세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땄던 사람인 만큼 중세 이탈리아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하고 탐구한 덕에 생활상에서 부터 당시 이탈리아의정세와 중세인들의 사상까지 완벽히 소설에 담아내었다. 이것만 보면 굉장히 고리타분해 보이는 얘기인 것 같지만주 무대인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추리 소설로서도 충실한 플롯을 가지고 있고 이게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에 서스펜스가 넘친다. 유머도 적절히 집어 넣으면서 픽션으로서의 재미도 충분히 살렸고, 거기에다 정치적으로는 여러 국가들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종교적으로도 끊임없이 벌어졌던 이단 논쟁에서 방황하는 윌리엄 수사와 아드소 수사의 이야기를 조망하며 이끌어 내는 철학적 메시지까지 뭐 하나 빠지는게 없는 작품이었다.


작중 등장인물 대부분이 중세 가톨릭 신학자나 수도사들이고, 시대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도입부 부터 쏟아지는생소한 사람들의 이름들과 이를 설명하는 주석들 때문에 힘이 빠지지만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추리물, 철학에세이, 시대극이 가진 재미를 모조리 담아낸 종합선물세트 같은 명작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서가 취미라고 자부한다면 일독을 권한다.


4.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中


제 1차 세계대전과 전간기 동안 외교관으로 활동한 적이 있고 이후 러시아의 역사와 관련해서 여러 논문과 저작들을 집필했던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 (Edward Hallet Carr) 가 생전 강의했던 내용을옮겨놓은 책이다. 제목을 보면 역사가 무엇인지 개괄적으로 설명해주는 개론서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내용이 아니라 역사가 어떻게 쓰이는지 또 어떻게 역사를 저술하여야 하는지 고찰하는 역사철학서이자 비평서에 가깝다.


이 책은 역사란 무엇인지에 대해 자문 (自問) 하면서 시작한다. 이윽고 역사란 어떤 주관적이 판단없이 있는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적어내는 게 정론이라는 독일의 사학자 레오폴드 폰 랑케 (Leopold von Ranke) 와 역사란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역사가들에 의해 쓰이는 만큼 필시 역사에는 객관적인 정론은 없으며 수많은 주관적인 관점들만 존재한다는 영국의 사학자 로빈 조지 콜링우드 (Robin George Collingwood) 를 비판한다. 그 다음에는 위인용문에서 보이듯이 역사란 현재를 살고 있는 역사가와 과거의 사실을 담아내고 있는 사료들이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만들어지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라고 자답 (自答) 한다. 즉 역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를 나열해서 적어 놓고이를 맹종하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의 사실을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수정해나가는 생동하는것이라는 얘기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가 다루는 인물과 사회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도 따지고, 역사를 저술하는 방법론도 다루고, 역사적인 사건을 다룰 때 인과관계 조정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 주제들에 대해 강의한다. 상술하였듯이 이 책은역사철학서이자 비평서인만큼 기존의 철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사상과 이론을 인용하는 동시에 디스한다. 디스하는사람들은 앞에 얘기했던 랑케와 콜링우드, 토머스 칼라일,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사야 벌린 등 기라성 같은 역사가들도 있고, 게오르크 헤겔, 카를 포퍼와 같이 철학사의 족적을 남긴 거물 철학가들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풍도 거침없이 깐다. 물론 원색적인 비난만 담긴 것은 절대 아니고 확고한 논리체계와 근거 하에 전개하는 만큼 카 교수의 열변을 천천히 뜯어보는 것도 이 책의 재미요소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5.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무정부체제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하나는 창조자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파괴자의 얼굴이야."


브이 포 벤데타 中


동명의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책이다. 예전에 사놓고 한 번 읽어 봤던 책인데, 읽은 지 오래되기도 했고 그래픽노블로 분류되는 만큼 어마어마한 대사량을 자랑해서 건성건성 읽고 끝냈던 책이라 차근차근 곱씹어 볼 겸 다시꺼내들었다.


이 책의 배경설정을 대강 설명하자면 1980년대 즈음 군축을 하던 영국이 핵폭탄을 맞아 기존 정부체계가 무너지면서 혼란상이 이어지다가 노스파이어 (Norsefire) 라는 파시스트 단체가 우위를 점하면서 대부분의 영국 (잉글랜드) 이 파시즘 통치 아래서 신음하는 디스토피아다. 본작의 파시즘 정부가 운용하는 수용소에 끌려가 끔찍한 실험을 당해 미쳐버린 끝에 한때 국회의사당 폭탄 테러로 영국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테러리스트 가이 포크스의 복면을 뒤집어쓰고 테러로써 정부에 복수 (Vendetta) 하려는 아나키스트 브이 (V) 와 전쟁 중 어머니를병사로 여의고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던 경력으로 노스파이어에 의해 끌려가서 양친을 잃고 굶주림에 시달렸던 소녀 이비 해먼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만 보면 여느 평범한 복수물로도 보일 수 있겠다만 이 책은 그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수용소 생활과 실험으로 브이가 맛이 가버리긴 했지만 그 여파로 매력적인 성격도 갖추게 된 덕에 전체주의 통치로 짓눌리고 잊혀진 예술작품과 아름다운 인간상을 연민하고 노래를 지어부르는 음유시인스러운 면모도갖추었다. 또 브이는 이상하리만치 V 이니셜에 집착하며 V 로 시작하는 여러 단어들을 늘어놓는 언어유희를 즐기는데, 처음엔 단순 말장난으로만 알았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수없이 불렸던 V 들이 무자비하게 (viciously) 복수 (Vendetta) 를 행하는 브이 (V) 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작중 고귀함으로 비춰지기도 하는 바이올렛 카슨 장미(Violet Carson) 를 의미하기도 하고, 여러 극적인 시퀀스로 이뤄졌지만 소박한 보드빌 (vaudville) 과 같은  사람들의 삶 (la vie) 을 의미하기도 하는 등 매우 다양한 (various) 의미를 함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본 작품 서두에 실린 작화가 데이비드 로이드의 말처럼 이 책은 딱히 명랑한 캐릭터들이 명랑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즐거운 작품은 아니지만 잿빛과 같은 전체주의 디스토피아에서 벌어지는 일을 문학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만큼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와는 다른 맛이 있으니 기회가 되면 영화를 보았더라도 한 번 정도는 찾아보는 걸 권장한다. 다만, 본인이 읽었던 2009년 판본은 되게 딱딱한 직역체에 영어를 잘 못하는 내가 봐도 눈에 띄는 오역들이 제법 보이는 편이라 추천하지는 않고 번역을 대대적으로 손을 본 30주년 에디션이나 영어가 되면 원서를 찾아보길 바란다.


6. 1984 (Nineteen Eigthy-Four)


"정통주의는 생각하지 않는 것.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걸 뜻하네. 요컨대 정통주의란 무의식 그 자체일세."


1984 中


말이 필요없는 독갤 필독서 1984 도 읽어보았다. 익히 잘 알려졌듯이 전체주의적 감시체제 아래에 있는 오세아니아 영국에서 힘든 나날을 이어나가는 기록 담당 공무원 윈스턴 스미스 (Winston Smith) 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보통 현실에서 1984를 인용하면서 자주 언급되는 요소들은 감시체제의 정점에 있는 빅 브라더 (Big Brother) 나 CCTV 가 탑재된 TV 형태로 온 사람들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 (Telescreen) 이지만 개인적으로나를 가장 전율시켰던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사실도 맞는 얘기로 생각하게 만드는 이중사고 (Doublethink) 와 기존에 다양하게 존재하던 수많은 어휘들을 전부다 솎아내서 체제의 순응적인 단어들만 남겨 어떤 비판적인 의견도 남기기 어렵고 그럴 생각조차도 못하게 만드는 신어 (新語, Newspeak) 였다. 이중사고는 2+2=4 와2+2=5 라는 서로 상충되는 명제를 맞이할 때 체제가 2+2=5 가 맞다고 하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에 따라가게만들고 인공언어로 각인되어 체제에 반항적이 사고조차 못한다는 상상은 실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여담으로 오웰의 학창시절 프랑스어 교사이자 1984 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디스토피아 명작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는데 이 책과 연관지어 곱씹어 볼만 하다. "자유는 끝없이 경계하여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The price of liberty is eternal vigilance)."


7.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노인과 바다 中


윌리엄 포크너 (William Faulkner) 와 F. 스콧 피츠제럴드 (F. Scott Fitzgerald) 와 더불어 20세기 초중반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가 생전 마지막으로 출판한 소설이다. 사실 이 책의 플롯은 84일 동안 한 마리도 낚지 못한 쿠바의 한 늙은 어부가 절치부심하여 조각배 하나에 의존해 큰물고기를 낚으러 나간다는 얘기로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진가는 헤밍웨이 특유의 건조하면서도간결하지만 함축적인 어휘를 구사하는 문체로 묘사되는 바다와 격정적이면서도 생동감 있게 풀어가는 내러티브에있다. 문장이 간단하게 쓰여져 있는데도 계속 읽으면 읽을수록 시간에 따라 여러 빛깔이 나는 바다가 머리 속에서칠해지는 것만 같고 고되게 낚시를 이어나가는 노인의 모습이 선선하게 그려져서 덩달아 감정이 고조되며 글에 취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한 위의 인용문처럼 이른 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으로도 불리는 백전불굴의 인간찬가를 주제로 다루기도 했는데, 단순 근성만을 강조하거나 성공신화 같은 얘기를 다루는 게 아니라 비록 세월이 흐르면서 몸이 무뎌지기에 필연적으로 사람은 살아갈수록 '파멸' 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런 비극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삶을 이어나가는인간성을 강조함으로써 신화적인 느낌까지 들 정도로 감정을 고양시킨다.


앞서 강조했듯이 간단한 문체와 구성을 갖췄지만 훌룡한 내러티브를 갖춘 명작이니 만큼 혹시라도 고전 소설을 읽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이 책을 입문작으로 강력 추천드리는 바이다.


8. 신곡 (La comedía di Dante Alighieri)


"거기서 찾았던 선 (善) 을 다루기 위해 거기서 보아 둔 다른 것들도 말하려 한다."


신곡 中


중세 피렌체에서 나고 자란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 가 인생을 바쳐 집필한 대서사시입니다. 세계사 시간에 르네상스에 대해 배울 때 한 번씩은 들어보게 되는 이름으로, 익히 알려져 있듯이 미지의 숲속에서 방황하던 순례자 단테가 시인 중의 으뜸으로 평가 받는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짝사랑하던 여인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한다는 내용인데 이 때문에 잘 알려져 지명도는 높은 편이지만 정작 다 읽어 본 경우는 많지 않은 편이다. 필자도 이 책을 처음 손에 넣게 된 계기가 학창시절 신곡에 대해 배운 적이 있어 호기심에 생겨서 읽어 본 거였는데 다소 생소한 시 (詩) 형태를 띈데다 중세시대가 배경이니만큼 처음 들어보는 개념들을 빼곡히 설명해 놓은 주석의 압박에 기가 죽어 다 읽어 보진 못했고 연옥편까지만 읽고 덮었다.


그렇게 수 해 동안 읽지도 않고 방치하다가 다시 한 번 독서 의욕이 불붙어서 다시 도전해 본 결과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을 완독하는데 성공했다. 또 어렸을 때 보면서 느꼈던 단편적인 인상들도 수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책에서 묘사되는 지옥에서는 단테를 모함하고 적대했던 정적들이 우글거리고, 지상에서 참회하지 못한 죄를 고행으로 씻어내면서 천국으로 오르는 곳인 연옥에서는 단테의 동료들과 스승이 있는 것을 보고는 제 어린 시절에는단테 이 양반 참 속 좁은 양반일세 하는 단순무식한 생각만 했었는데 나이를 좀 먹고 단테의 인생역정과 혼란스러웠던 중세 이탈리아의 상황을 겹쳐서 보니 단테의 회한과 이상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하였다. 개인적인 감상평을 보태자면 지옥에서는 도시국가들의 분쟁과 고향 피렌체 정가에서 횡행했던 권모술수와 당시 부패했던 가톨릭교회에 대한 단테의 환멸이 담겨져 있고, 연옥편에서는 자신의 미덕함과 속세에서 벌어진 부조리에 대한 뼈저리면서도 날선 성찰들을 살펴볼 수 있었고, 천국편에서는 기독교적 신앙과 세계관에서 기반한 이상향과 그를 바탕으로한 단테의 구원관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이 책이 서사시 (Epic) 의 형태를 띈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신곡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와 문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작중 화자인 단테가 지옥, 연옥, 천국의 광경을 묘사하면서 그리스 신화에서 일어났던일들에 빗대고 등장인물 중에서도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이들도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가장 잘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하나 꼽자면 '엘리오스' 라는 단어인데 히브리어로 하느님이라는 뜻의 '엘로힘 (Elohim, אלהים)' 과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의 신인 '헬리오스 (Helios, Ἥλιος) 를 합친 말로 작중에서도 하느님 (야훼) 로묘사되는 태양을 일컬을 때도 언급됐던 단어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와 기독교적 세계관이 적절히 조합된 역작이다보니 그냥 일개 독자인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지성인들과 문학가들이 괜히 수 세기 동안 이건 못참겠다며 공중제비 돌고 침이 다 마르도록 신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게 아닌 것 같다.


9.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Mors certa, vita incerta (죽음은 확실해도, 인생은 불확실한 것)"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中


미국 SF 계에서 명작가 중 하나로 거론되는 필립 K. 딕 (Phillip K. Dick) 이 60년대에 집필한 장편소설이다. SF 영화계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되는 리처드 스콧 연출의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의 원작으로도 잘알려져 있다. (다만 소설과 영화의 주제, 줄거리, 분위기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하던 시대가60년대다 보니 요즘 들어서 보면 가전제품들이 완전히 구동되기 전 예열 과정을 거치고 촌스러운 취급을 받는 레이저 총기들이 등장하고 지금은 해체된지 30년이 넘은 소련이 존재하는 나라로 남아있는 등 다소 구식의 느낌이들긴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중 안드로이드가 주 소재로 다뤄지는데,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분짓는 요소가 금속으로이뤄진 몸이나 이에 기반한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체력과 완력 차이 같은 물리적인 요소가 아니라 얼마나 다른 대상을 상대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지와 같은 정신적인 요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중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분하는 검사법 중 하나인 보이트 캠프 척도 (The Voigt-Kampff Test) 도 원래는 정신질환을 진단하는데 사용되었던 검사법이라는 데서 이를 적나라하게 들어낸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제법 연식이 된 SF 이기도 하고, 현재 들어서는 안드로이드에 관한 작품들이 우후죽순으로나오기 하였지만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차이점을 정신적인 것에다 놓고 탐구해가는 인간과 현실에 대해 탐구해 나가는 특색있는 고찰이 담긴 이 책은 지금까지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10.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들의 이정표가 될지 모르니' 서산대사의 설야 (雪野) 글귀를 가슴팍에 새기며 살고 있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中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축구선수 손흥민의 아버지이자, 전직 프로 축구선수 이며 유소년 축구를 가르치고 있는 손축구아카데미 감독을 맡고 있는 손웅정 씨의 자서전이다. 고전 문학만 줄곧 읽다가 조금 말랑말랑한 걸 읽고 싶어서 꺼내든 책이다. 손웅정 본인 말마따나로는 코로나 창궐 이후 손흥민 선수가 부상 치료차 한국과 영국을 드나드는 일이 많았는데 그러면서 적잖은 자가격리 시간을 보내야 되서 그 기간동안 났었던생각들을 글로 정리한 책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손흥민 선수가 승승장구 하는데 큰 도움이 됐던게 유소년 시절 아버지의 특별 훈련 덕이라는 이야기가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덩달아 손웅정 씨의 인지도도 올라간만큼 손웅정 본인의 교육철학에 대한 생각이 이 책의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주요 특징이라면 항상 겸손할 것을 강조하는 것도 있겠지만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축구를 하면서 단순히 성적과 트로피에 목매기 보다는 축구에 얼마나 만족감을 느끼는지 생각하고, 또 축구에만족한다면 이걸 더 오래동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주안점을 두라고 한 점이었다.


또 손웅정 본인의 유소년 선수 시절도 다루고 있는데 아직 자라나는 어린 선수들을 상대로 오직 성적과 결과만을들이밀면서 중압감을 주고, 체벌도 일상이였던데다,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갔던 옛날 한국 축구계를 글로나마 간접적으로 접하니 절로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작가 본인이 젊은 시절 축구선수로서 세월을 회상하며 철저히 실패한 선수였다는 자평을 내렸다는데, 자신의 실패담을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이 겪어왔던 한국 축구 엘리트코스와는 정반대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신의 아들인 손흥윤과 손흥민을 훈련시켰다는 점은 제법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손웅정 씨가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했던 얘기도 제법 담겨있어서 반드시 읽어봐야 할 만큼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들어 있는 건 아니지만 손웅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생겼다면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1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 -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부고 소식이 들렸나 말았나로 독갤에서 논쟁이 일고 있는 체코의 문학가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의 장편소설이다. 나에겐 처음으로 접해본 불문학인데 이 책도 어렸을 때 한 번만 읽어보고 나서 책장에 방치해 두다가 독서욕구가 다시 돌아온 최근 다시금 집어든 책이다.


이 책의 장르를 규정해 보자면 바람기가 좀 들어간 로맨스 소설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작가가 화자로 등장하면서이야기를 서술해 나가는 방식 참 특이하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람둥이 의사 토마시, 사진작가 테레자, 화가사비나, 교수 프란츠를 등장시키는 방식도 어떻게 어떻게 태어났다라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어떤 문장에서 비롯해서 태어난 인물이다라고 소개시키며 허구적인 인물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여느 소설처럼 전지적 화자가 인물들의 생각과 처한 상황을 묘사하는데만 그치지 않고 화자 본인이 철학이나 사상을 늘어놓으면서 내러티브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앞서 얘기하였듯이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라 했지만 사실 로맨스 소설로만 규정하기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본작의 시대배경은 체코 및 슬로바키아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 중 하나인 '프라하의 봄' 이다. 원래공산권에서도 유독 경직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68년 새롭게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단행한 적이 있는데 소련이 이에 크게 반발하며 군대를 이끌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사건이다. 사건 진행 자체는 큰 인명피해 없이 둡체크 서기장과 측근들이 모스크바로 압송되면서 일단락 됐지만 기존에 경직됐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과 소련의 침공을 비판하고, 생생히 보도했던 이들은 원래 직장에서 쫓겨나고 여태까지 경력과 상관없는 허드렛일을 하고, 정부의 감시와 끈질긴 감시와 전향 회유에도시달리고, 최악의 경우 투옥까지 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은 전에 읽어봤던 1984 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작가인밀란 쿤데라가 실제 프라하의 봄 이후 본인이 겪었던 고초에서 따온 이야기들이다 보니 더 가슴에 와닿아 한결 더가슴이 먹먹했다.


또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파르니메데스가 내렸던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정의 (定意) 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원회귀 이론을 인용하는데, 각 등장인물들이 이야기가 진행되며 내리는 중대한 선택들과 연관지으며 화자인 작가가 삶이란 한 순간 마주하게 되는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삶이 그때그때 얼마나 달라지는지 역설하였는데 나에겐 굉장히 흥미로운 얘기였다. 어렸을 때는 단순히 난해하게만 보았던 작가의 장광설이 나이를 먹으면서달라진 삶의 관점과 다시 보니 실로 가슴이 먹먹한 등장인물들의 역정을 겹쳐 보게 되어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 좋게 말하면 독특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서술하고 나쁘게 보면 산만한 구성을 갖춘 책이지만 관심이 생겼다면 적극적으로 독서를 권하고픈 걸작이니 기회되면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12. 주홍색 연구 (A Study in Scarlet)


"특이한 요소는 사건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건 해결의 길잡이 역할을 해줍니다."


주홍색 연구 中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아서 코난 도일 (Arthur Conan Doyle) 이라는 의사가 병원을 개원했는데, 병원에 환자가 찾아오지 않아 파리가 날리자 시간 죽일 겸 집필했던 추리소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장편이다. 사실 셜록 홈즈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캐릭터지만 나의 경우에는 원전을 읽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운이 좋게도황금가지판 전집 세트를 통째로 선물 받았는데, 당시에는 독서에 별 재미를 못 느껴 묵혀두기만 하다가 이번 기회에 꺼내서 읽어 보기로 했다.


이 책의 주인공 중 하나인 셜록 홈즈는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성을 갖고 있는 캐릭터인데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범죄 수사에 도움될 만한 지식에만 통달하고 나머지 상식 (기본적인 시사상식, 토머스 칼라일, 지동설 등) 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는 괴짜이면서도 적당한 유머와 매너를 겸비한 인간적인 캐릭터다. 또한 거의 스캔에 비견되다시피한 세심한 관찰로 범인이나 행인의 직업과 행동거지, 성품을 완벽히 추리해 내는 점도 인상 깊은데, 어찌보면 빨라야 1960년대 정도에나 보편화된 프로파일링을 1880년대에 엇비슷하게 구현해 낸거다 보니 꽤 놀라웠다.


그리고 주홍색 연구는 분명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이지만 다른 추리소설들이 풍기는 하드보일드한 분위기는 그리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낭만주의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작품이었다. 아무래도 시대배경이 영국인들에게 낙관주의를 선물해주었던 빅토리아 시대다 보니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사람과 살인을 행한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며 그들이 지닌 일종의 '사명'을 조명하다보니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더 배가되는것 같았다.


여담으로 내가 읽었던 황금가지 판 전집이 오역으로 얘기가 좀 나오긴 하지만 으레 번역 작품에서 느껴지는 번역체가 아니라 적당히 고풍스러운 어휘로 근대적인 느낌도 물씬내고 작중 등장인물들의 대사도 화자의 나이를 반영하여 매끄럽게 윤문했다 보니 확실히 읽는 재미가 있었던 판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