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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ergyman이면 성직자라고 번역해야지, 게다가 카톨릭도 아니고 성공회 성직자인데 굳이 신부(성공회 성직자의 존칭)라고 번역할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음. 하지만 일단 역자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제목은 '신부의 딸'이라고 언급함.
1928년 버마 경찰이라는 안정된 직장이라는 그만둔 오웰은 글 쓰기에 투신한다. 하지만 어려운 생활과(경찰로 재직하면서 받은 막대한 봉급은 매춘부에게 다 탕진헀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이렇게 몇년 동안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한 끝에 1934년 첫 장편소설인 '버마의 나날'을 출판하게 된다. 체제의 부조리함에 소극적으로 저항하고자했지만 실패하고 주인공의 자살이라는 결말을 맺는 비극적 리얼리즘 스토리는 후일 1984에서 간접적으로 재현된다.
첫 소설이 미국에서 발매된 직후 오웰은 두번째 장편소설 집필에 착수한다. 첫 소설이 제국주의의 하수인으로 일했던 버마 시절을 다루었다면 두번째 소설은 작가로 등장하기 직전인 홉 따기와 교사 생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부의 딸'은 오웰의 소설 중에서 가장 실험적인 소설인데 오웰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스토리가 큰 의미를 지니지않고 1~5부가 각각 반쯤 독립된 스토리로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시도는 당시 유행했던 모더니즘, 특히 1922년 출판되었던 율리시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는데, 제목 자체가 율리시스의 한 토막에서 따왔다는 썰은 흘려듣더라도 주인공 도로시 헤어가 초겨울 런던에서 덜덜 떨면서 노숙하는 부분이 율리시스의 형식을 그대로 따왔다는 것은 아마 분명해보인다. (역설적이게도 비평가들은 해당 부분인 3부 1장을 가장 극찬했지만 오웰 본인은 그 부분을 가장 싫어했다고 한다. 나도 후자에 속한다. 엿먹어라, 모더니즘.)
이 소설의 스토리를 굳이 요약하자면 가난과 무지 그리고 광신적인 믿음에 시달리고 또 그 믿음에 스스로를 착취하는 도로시 헤어가 고향을 빠져나와 홉 따기와 교사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다져나가는 부분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형식상 3인칭 전지적 시점이지만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사실상 도로시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도로시의 경험과 시선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작중 등장하는 인물인 도로시는 무능력하면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류층의 향수에 사로잡혀있는 성공회 신부의 딸로서 가혹하면서도 어렵게 살아가고있다. 그는 자신이 하고있는 일을 강박적이다싶을 정도로 엄격하게 수행하고 있는데, 한순간이라도 자신이 정해놓은 기준에 만족하지 못하면 옷핀으로 자신의 팔뚝을 찌르는 잔인한 행동마저 서슴치않는다. 작중의 표헌을 옮기자면 "스스로를 낮추는 행위가 오히려 더 즐거운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 헛되게도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소녀를 괴롭힌다. 그리고 그런 시달림 속에서 소녀는 조금씩 탈진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향한 남자의 유혹과 그 유혹의 시도에 어떻게 대처하든 자신의 명예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도로시는 절망하고 만다. 그 결과 도로시는 8일 뒤 런던 한 복판에서 기억을 잃은채 나타난다. 왜? 작중에서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결말 부분에서 작중 등장인물이 가혹한 일상에 지쳐버린 심리적 방어기제가 아닐까 추측하는데, 실제 19세기 후반에는 그런 질병이 하층민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해설은 말하고 있다. 본인도 작중 설명에 동의한다. 도로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멍하니 서있다가 반쯤 납치되는 형태로 근처 농촌으로 홉따러 떠난다. 홉따러 가는길에 도로시는 '앨런'이라는 왠지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말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고 떠난다. 앨런은 노숙하고 굶주리며 때로는 도둑질한것을 나눠먹는 생활을 한 끝에 어렵게 홉 따기 일자리를 얻는다.
홉따기는 단순하면서도 고되고 보람이라고는 없는 생활이었지만 도로시는 왠지 모르게 그러한 일을 하면서 힘을 얻는다. 하지만 그런 낙관적인 희망은 일행의 마지막 동반자가 경찰에게 잡혀가면서 끝나고 만다. 얼마 안가 홉 수확까지 끝나버린 도로시는 몇푼 안되는 돈을 들고 런던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돈을 얼마 못가 숙박비로 써버린 도로시는 노숙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한편 무렵 도로시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남자와 야반도주한게 틀림없다고 믿으면서도 곰곰시 생각한 끝에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헐어서 도로시를 위한 수표를 발행한다. 그리고 앙숙이던 자신의 친척에게 도로시를 돌봐줄 것을 요청한다. 그 친척도 가문 이름이 신문에 오르는 것을 싫어해 사설 탐정을 고용해 도로시의 신변을 확보한다. 이제 뭐할 것이냐는 질문에 도로시는 '메이드'라는 왠지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직업을 하겠다고 고백한다. 친척은 말도 안되는 말이라고 일축한뒤 3류학교의 교사직으로 도로시를 취업시켜준다.
하지만 무지한 하층민을 가르치는 교사의 생활은 그 어느때보다 끔찍하고 고난에 찬 시절이었다. 교장은 교육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면서도 잔인한 고통을 주고 다른 이를 등쳐먹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일종의 정신병자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도로시는 일자리가 있으면서도 굶주리는 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혹시 여기서 소공녀를 읽으셨다면 대충 도로시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도로시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제대로 된 교육을 시도하려하지만 멍청한 학부모들은 셰익스피어의 책을 왜 읽어야하냐면서 산수와 글씨 쓰기만을 바란다고 항의한다. 더욱 비참한 것은 이러한 항의가 도로시의 체면을 파산시켜 학생들에게도 경멸받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결국 도로시는 이전 교사들처럼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이면서도 학생들과의 증오를 형성하는 관계가 되었다.그러면서도 이 모든 일을 제공한 교장은 학생들을 섭외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다른 교사에게 도로시의 일자리를 팔아넘기고 말았다. 결국 도로시는 학기가 끝나마자자 해고통보를 받고 30분만에 집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 때 도로시의 눈 앞에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도로시의 탕자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신부의 딸'의 결말은 간단히 말해서 원상복귀다. 도로시는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기도의 효용성에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전처럼 신을 한순간이라도 생각치않는 것을 죄악이라고 여기는 것과 달리 도로시는 이제 신따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도 도로시는 이전 생활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탕자는 그러한 태도가 "무너진 교회 속에 신자가 단 한 명뿐인 종파"를 세우는 것과 다름없다고 반박하지만 도로시는 그 말에 반박도 대응조차 하지 않은채 그러려니 한다. 탕자는 이에 자신과의 결혼을 (농담삼아) 권유하지만 도로시는 그것을 거부하고 시골 회당로 돌아가 빈곤한 교회의 예산을 충당하기 위한 바쁘디 바쁜 노동으로 복귀한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도로시는 이제 자신의 미래에 어떤 두려움도 지니지 않는다. 1부의 도로시는 스스로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로지 끝없는 노동과 신자로서의 책무만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도로시는 홉 따기와 노숙, 그리고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인간은 살아가겠다는 의지와 노력을 겸비한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원칙을 체득하였다. 그녀는 이제 경제적 어려움, 신실함의 문제,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닥까지 추락한 그녀는 그런 생활 속에서 오히려 보람과 긍지를 가졌고 그 경험은 더욱 잔인한 추락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단단해졌고 성숙해졌다. 그리하여 '신부의 딸'로서 기억조차 가지지 않고 내쫓긴 그녀는 이제 한명의 인간인 '도로시 헤어'로서 온전한 자신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지금의 삶이 어려운 것은 부가적인 문제임을 믿게 된 것이었다. 다만 소설에서는 도로시 헤어의 그런 믿음이 아직은 완전하게 여물었지않음을 암시한채 막을 내리게 된다.
소설의 해설자는 도로시의 이러한 결단을 두고 '무신론자 성녀'라고 정의내린다. 신을 더 이상 믿지 않지만 그럼으로서 오히려 성녀에 다 가까워진 여인. 역설적이지만 이 또한 적절한 표현이다. 기독교인이 종교를 가짐으로서 지니는 최고의 보상은 내세에서의 행복이다. 하지만 도로시는 그것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음에도 기독교의 가치가 있음을 믿고 자신의 고향과 자라왔던 환경으로 돌아간다. (물론 이러한 설명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당장 출판사 내부 평론부터 "정신분석학으로는 최고지만 출판하기에는 불가능"이라고 말할 정도로 약간 엉성한 편이다.) 마치 작가 조지 오웰이 영국의 모순과 부조리에 끝없이 실망하면서도 그 모순을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노력했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부의 딸'은 오웰의 또 다른 한 자아이자 당시를 살아갔던 존재했을법한 영국인의 투영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리라.
* 아니 근데 역자 다른건 다 이해하는데 당귀(Angelica)를 안젤리카라고 직역함? 살면서 당귀라는 단어를 한번도 본 적 없으신가?
이제 엽랍을 날려라도
그건 이미 썼음
카톨릭 신부는 딸을 낳을수 없으니까..
좋습니다 - dc App
엿 먹어라 모더니즘 개추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