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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이니의 <노바>가 드디어 나와 간만에 다시 읽은 소설이다. 새뮤얼 딜레이니는 SF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꽤나 익숙할 이름으로, 보통 로저 젤라즈니와 함께 SF 뉴웨이브의 두 축으로 손꼽히는 저자이며, 실제로 상당히 '화려한' 글을 쓴다. 사실 형식 상으로는 알프리드 베스터를 좋아하는 젤라즈니보다도 훨씬 더 베스터처럼 자유분방한 글을 쓰는 것 같기도 하지만. 물론, <바벨 17> 외에 아무 것도 읽어보지 않은 작가가 어떤 식으로 쓰는지를 논하는 건 약간 우스운 일이기도 하고, 아직 <노바>를 읽지 않았으니 (2주 내로 읽게 되겠지만) 일단은 <바벨 17>만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타당할 테다.
<바벨 17>은 일종의 언어학 SF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중심 소재가 바로 이 언어에 있다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문학에서-탈식민주의 혹은 디아스포라 문학 등에서-중심 소재로 자주 쓰이는 내면의 모국어 주제가 여기에서는 훨씬 더 극단적인 형태로 변주된다. 사피어-워프 가설이라고도 불리는, 모국어가 사고의 한계를 어느 정도 결정한다는 주제 말이다. 아무리 문학에서 다양한 언어로 인한 생각의 다양성을 다룬다고 해도 세계의 언어들이 정말 '그 정도로'까지 다양하지는 않다보니, SF의 뻔뻔함이 있어야 비로소 빛이 나는 소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슷하게 비교적 최근 SF 중에서는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가 비슷한 소재를 다소 축소된 규모와 애수적인 감성으로 훌륭히 그려냈기도 하니.
특히 <바벨 17>에서는 SF의 뻔뻔함과 문학적 상상력이 맞닿아, 이 바벨-17이라는 가공의 언어가 다루는 개념의 복합성에서 보르헤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예전에 <바벨 17>을 처음 읽을 때는 바벨-17 역시 보르헤스의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등장하는 형용사만으로 이뤄진 언어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니면 <기억의 명수 푸네스>에서처럼 어떤 한 순간을 극단적으로 세밀하게 담아낼 수 있는 언어라든가. 그런 쪽과는 좀 거리가 멀면서, 너무 구체적으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말이다. SF적 뻔뻔함은 바로 이 흥미를 돋우다가 딱, 멈춰버리는 점에도 있다고 생각하긴 한다. 마치 우리로 하여금 나머지 부분들을 상상하라는 양, 일부만을 슬쩍 슬쩍 내비춰주고 그러한 언어를 생각해보라, 하는 식으로.
덕분에 이 바벨-17을 이해하게 된 주인공이 점차 신체의 무의식적 반언어-비언어 표현들을 읽어나가며 텔레파시 능력을 각성하고 우주선에 있는 선원들 전체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주인공 자신의 행동이 그 옆에 병치되는 서술은 SF에서만 가능한 울프스러움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울프라면 이런 과장스러운 양식을 불편해했겠지만.) 그리고 언어는 점차 그녀의 모국어를 잠식하며, 영어로 말해야 할 것을 바벨-17의 훨씬 더 간결한 언어로 말하려 하다가 말을 제대로 못하곤 하는 상황들까지 나온다. 바벨-17은 사람을 하나의 컴퓨터처럼 바라보며 그 다양하지만 배타적인 언어로 언어 구사자의 행동을 구사하는 바이러스가 된다.
그러나 역시 참 아쉬운 것은 이것이 그럼에도 여전히 좀 뻔한 스페이스 오페라 이야기라는 점이다. 외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나아가 공격을 막거나 음모에 휘말리고 구출되기도 하는 식의. 참 흥미로운 소재와 흥미로운 글이지만, 서사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내게 일반 문학에서 느껴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다가온다. 아마 이 점이 일반적인 SF 팬들에게 딜레이니의 장점으로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아쉬운 일이다. 나는 아무래도 미국 주류 SF의 느낌 자체에는 그리 흥미를 못 느끼는 모양이다.
좋은 글 잘봤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아직 연구중이라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어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거나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언어의 복합적인 부분을 안다거나. 테드창 영화 잼게 봤는데 바벨-17도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아참 그리고 우리가 외계인을 처음 만난다면, 언어소통 보다는 물물교환을 먼저 할것같ㅂ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