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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떤면에서 리뷰의 형식 아닌 논설문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은 책을 읽고 스스로 생각하고 검토한것을 모은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유의 시발점이 아자 가트의 민족이기에 이 글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감상문이라고 할수있기에 감상택에 이 글을 적었습니다.)





민족주의 이 단어 만큼 수많은 파장을 일으켰으며 앞으로도 일으킬 정치적 단어는 아마 참으로 드물것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게하는데 누군가에게는 숭고함을 누군가에게는 분노와 세뇌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느끼게 하는것이다. 특히 이중에서 후자를 느끼는것이 요새 소위 깨어있는 청년들의 본업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중에는 가장 원색적인 국뽕이라는 욕이 있는데 이것은 이 단어가 과거와 다르게 숭배의 대상이 아닌 공격의 대상에 가까워졌음을 입증한다. 그러니 나는 이 단어가 가진 긍정적인면이 아닌 부정적인 면에서 집중하겠다. 이 단어의 부정은 도데체 무엇인가? 내가 두개의 단어로 정의를 하겠다.



1.배타심


2.편애



이것들이 이 단어를 사악한 증오의 광기로 만드는데 대량학살 추방 전쟁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배타적이기에 타인들과 벽을 만들며 이 단어는 편애적이기에 세상의 분열과 갈등을 만든다. 이 모든것들이 참으로 옳은 것임은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자들은 모두다 인정할것이다. 확실히 이 단어로 인해서 수억이 고통받고 수백만의 악이 생겨났다. 그래 이 모든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늘 의문을 품는것은 왜 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속성을 가진 무언가가 아직도 신성성을 가진것 처럼 행세하는것에 관해서이다. 그 단어는 수천만명에게 사랑과 따듯함을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는것이다. 바로 "가족"이다. 왜 이게 같은지 궁금할것이다. 내가 설명을 하자면



1.가족은 배타적이다.



배타적이란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어떤 집단에 가입하는것의 허들을 뜻한다. 예를 들어서 의사 공동체에는 의사 자격증이라는 허들이 있다. 그리고 동창회에는 학력이라는 허들이 존재한다. 배타성이 높다는것은 이 허들이 높다는것이다. 그리고 높다라는것은 그것을 획득하는것에 힘이 많이 들거나 아니면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경우들을 뜻한다. 예를 들어서 귀족은 혈통에 기반하기에 외부인들이 귀족이 된다는것은 불가능한것이니 신분제는 아주 높은 허들을 가졌다고 말해줄수 있다. 그리고 의사 자격증을 따는것은 너무나 어렵기에 의사 공동체의 회원이 되는것 또한 아주 높은 허들을 가졌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전자는 불가능한 반면 후자는 가능성의 여부가 아주 약간이라도 있기에 허들이 낮다고 할수 있다. 그러니 선천성 그러니 혈연에 의존하는 것은 가장 높은 허들이 있다고 할수 있으며 의사 자격증 처럼 엄청난 노력을 해야하는 허들은 전자보단 낮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경우 보다 훨신 높다고 할수 있다.



우리가 민족이 배타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민족이 되는 허들의 높음 때문이다. 확고한 민족 구성원은 두가지 허들을 넘어야 한다.



1.혈연적 관계


2.완전한 문화적 습득



이것들중 하나가 강조되는 경우는 있지만 하나가 완전히 무시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니 이 허들들을 완전히 충족해야만 완전한 민족 구성원이 되는것이다. 이것을 보면 알겠지만 민족 구성원이 될려면 혈통이라는 엄청난 허들을 넘어야 하며 또한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꽤나 높은 허들들을 "동시에" 넘어야 한다. 만약 이 허들중 하나라도 넘지 못한다면 그 민족 구성원은 늘 외부인인지 아닌지 문제에 자유롭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하나의 허들이 말 그대로 완벽하다면 민족 구성원으로 인정받을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혈연적 관계는 가장 강한 우위를 가지는데 완벽한 순혈 혈통은 사실상 어떤 경우에도 그 나라의 민족으로 편입될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문화적 정체성도 그 허들을 넘지 못할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민족의 강조점에 따라 다를수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이 이중 허들을 가진 민족과 가장 가까운 집단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 할것없이 바로 가족 공동체다. 이것은 민족과 같은의미로 배타적인데 왜냐하면 혈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데 이 혈연이란 요소는 가족 공동체에 타인이 들어오는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분명히 입양 같은 방법이 있긴 하지만 입양아와 양부모의 갈등과 트라우마와 자격지심은 너무나 대중적이며 확고한 이유가 있다는것을 또한 수많은 학대 사례가 양부모의 행위라고 예상되는 이유를 알거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입양이 혈연보다 강할때도 있지만 우리는 그 끈끈한 입양 사례들이 대부분 영유아일때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가족 공동체의 폐쇄성의 증거인데 아주 어렸을때 양육이라는 과정을 겪어야만 최소한의 가족의 관계가 형성될수 있다는것이다. 이것은 사회의 거의 모든 공동체와 비교할때 가장 폐쇄적이라는 수식어에 가장 어울린다고 할수있다. 요약을 하자면 우리는 완벽한 가족의 일원에 대한 기준이 2가지이다.



1.혈연적 관계


2.양육의 여부



이 두가지가 동시에 있어야만 완벽한 가족 공동체로 인정받을수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중 하나가 부족하다면 완벽한 가족 공동체로 인정되는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나 분석을 해보자 이중에서 혈연적 관계는 아주 중요한데 만약 완벽한 혈연적 관계가 입증된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관계는 가족 관계로 재정립되는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나 일상적인데 왜냐하면 가족 공동체란 근본적으로 혈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완벽한 양육은 민족과 다르게 스스로의 노력으로 결정될수 없는것이다. 이 점에서 가족 공동체는 민족보다 더욱더 강한 배타성을 띄는데 이것이 뜻하는건 가족 공동체란 사실상 스스로의 노력이 아닌 혈연과 양육이라는 수동성에 의존한다는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가족 공동체는 민족 공동체보다 훨신 배타적이라고 할수있다.




여기서 내가 이것을 배타성을 탐구한 이유는 가족 공동체와 민족 공동체의 배타성의 동질성을 밝히는것이다. 이 둘은 혈연적 관계 그리고 후천적인 획득 성질이 동시에 존재해야만 완벽한 공동체가 되며 이것들은 이 공동체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중대한 공통점이라고 할수있다. 이제 배타성은 끝났으니 편애를 이야기할 차례다.




2.가족은 편애이다.



우리는 우리와 같다는 이유 만으로 그들에게 잘해준다. 우리는 흔히들 바다에 빠진 사람 두명이 국적빼고 모두 같다고 할때 우리는 거의 우리와 같은 국적의 사람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예술 작품을 볼때 늘 타인들의 것보다 우월감을 느낀다. 타인들이 우리와 같은 감상을 갖지 못하는것에 늘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예술 작품이 타인의것이었다면 우리도 그들 처럼 반응했을것이다. 또한 우리는 복지를 할때 흑인종들보다 한국인을 더 선호하는데 왜냐하면 우리에게 흑인들보다 한국인이 더욱더 가엽고 불쌍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거 유명한 역사학자 아자 가트가 미국인들이 스칸디나바와 같은 복지국가를 하지 않은 이유를 빈정거리며 말했던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언어와 피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복지 혜택을 줄 용의가 있지만 외국에서 온 예멘인들에게는 한푼의 돈도 줄 용의가 없는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혈통과 비슷함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신의 민족을 선호하는것은 정당화 불가능한 명백한 편애이다.



이것을 수많은 용어로 합리화할수 있겠지만 그 모든건 이 편애를 감추기 위한 위장술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족은 어떤가?



가족이야말로 편애의 절정인곳인데 한번 생각해보길 이것을 읽는 독자분의 어머니가 독자분과 같은 나이의 비슷한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쏟는 사랑의 100분의1이라도 쏟는지 말이다. 타당하고 지당하고 절대적 진리는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를 말그대로 편애 한다는것이다. 우리의 멍청한 그림에 부모님들은 어린 고흐를 떠울리며 우리가 어쩌다 맞은 100점짜리 시험지를 보면 아인슈타인을 연상한다. 만약 타인의 자식이었다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만큼은 완벽하게 다른 행동과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그 이유는 참으로 천박한것인데 그 이유는 당신이 같은 혈통을 가졌거나 아니면 부모님에게 양육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우리의 부모님은 최악의 범죄 행각에 가담해도 우리를 변호할것이며 심지어 자신을 살해해도 우리에게 용서를 배풀 확률이 있는 지상의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편애이며 논리적이지 않음을 다들 알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이것이 정당하다면 같은 논리로 혈연과 인연으로 맺어진 민족의 편애도 정당해야 할테니 말이다.





소론



앞의 글에서 나는 가족 관계와 민족 관계의 유사성을 확인했다. 이것을 소개한것은 앞으로 나올 여러 논증의 근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배타성과 편애가 없는 민족이 없는것 처럼 배타성과 편애가 없는 가족도 없음을 인정하거나 가능성 있는것으로 여길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가? 이제부터 중요해진다. 앞에서 말했던데로 민족의 제일 큰 문제는 배타적이고 편애적이라는것이다.그것이 이 민족이라는 개념이 공격받는 제일 근원적인것이다. 그러나 만약 가족 또한 배타적이고 편애적이라면 우리는 왜 민족을 공격하는 명분을 가족에게 쓰지는 않는가?




위에 말한대로 민족은 배타적이다. 그러기에 타인들과 우리를 구분시킨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것이 편애를 일으키는것이다. 왜 이게 문제인가 하면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논리적으로 우리가 앞에 물에 빠진 두명의 사람중 한사람이 우리 민족이라는 이유로 그 사람을 구해야할 논리적 정당성이 있는가? 우리가 그 민족이라는 이유로 같은 민족 구성원에게 헌신을 가질 논리적 정당성이 있는가? 정답은 없다이다. 나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는 그것을 해야할 논리적 정당성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현실의 민족은 그런 편애를 아무렇지도 않게하며 타인들 보다 자신의 소속을 아낀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 금메달을 가지게 되면 환호를 하며 우리 민족 구성원이 피해를 당하면 분개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민족을 위해서 타인들을 노예화했으며 전쟁을 일으켰으며 집단적 광기에 빠졌다. 그 결과 홀로코스트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수백만 광기가 민족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것이 논리적으로 정당화할 유일한 방법은 사실상 없는데 우리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사랑할 논리적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편애도 이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의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나 엄밀한 논리성에서 우리가 우리의 자식을 사랑할 유일한 이유는 아이가 나의 혈통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아이를 어렸을때부터 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가 우리의 이 비정상적인 편애를 정당화할수 없다. 이런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 감정이 우리가 재난 사고에서 나의 자식을 우선할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다. 또한 이런 근거가 우리가 법정에서 우리의 자식을 변호할 근거를 마련하지도 않는다. 더욱더 나쁜것을 말할까? 우리는 우리의 가족을 위해서 교육 시스템의 헛점을 노리며 이것은 가장 고상한 학자들 또한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가족으로 인해서 수많은 비리가 일어나며 자식이란 이유로 우리는 최악의 왕따 가해자를 천사라고 변호한다. 그리고 우리는 가족을 위해서 끝없는 부를 모으며 악의 길로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수많은 악인들이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였다고 변명한다. 또한 우리는 자식을 구할수만 있다면 수천만명을 희생시킬수 있다. 우리의 가족애는 범죄의 씨앗이며 모든 악성의 근원중 하나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단호하게 가족애와 민족애 모두 소아병이자 인류의 홍역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결론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모님에게 소아병 환자 라고 부를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해지기를 만약 우리 부모의 사랑이 애국심이라면 그 어떤 광신도 애국자 보다 더 광적인 애국자 였을것임을 이것을 빠져나가고 싶다면 우리는 부모의 사랑이 애국심과 차별화되는 이유를 만들어내야한다. 내가 볼때 그런 길을 만들기는 참으로 힘든데 아마 누군가는 말할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인류종의 존속을 위해서 필수라고 그러나 국가도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국가가 없다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세상이 끝장날 것이다. 그러니 이것들은 비슷하다. 만약 실용성에 호소하여 가족애를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실용성에 호소하여 나치즘과 국수주의 또한 정당하다고 해야할것이다. 그러나 결코 아무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리 그러나 아직 희망을 가진 자들은 어떠한 탈민족주의를 주장할것이다. 나 또한 그 길이 이기는것을 소망하겠지만 나는 여러 이유로 그것의 논리성을 믿지 않음을 밝히겠다.




1.무정한 탈민족주의



이것은 쉽게 말해서 모든 민족에게 아무런 사랑도 애착도 느끼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니 공정한 재판관의 시선을 가지는것이며 아무런 편애도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것이다. 이들은 다른 국가가 이기든 말든 아무런 감졍 변화가 없다. 쉽게 말해서 모든 국가와 떨어짐으로서 객관적인 3자의 자세를 유지하며 객관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볼수 있다.


이 자세의 좋은 점은



1.공정성



이 자세는 모든 자세와 비교할때 공정성을 확보할수 있다. 편애가 나쁜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사탕을 주거나 모두에게 사탕을 주지 말아야한다. 그러나 전자가 물질적으로 불가하다면 아무에게도 사탕을 주면 안된다. 그래서 학교에서 늘 모두의 숫자에 맞추어서 무언가를 준비하는것이다.



2.논리성



이 자세는 확고한 논리성을 간직한다. 민족주의적 광기를 공격하면서도 자신은 잘못을 범하는 모순을 하지 않을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자세보다 이 자세는 논리적인 엄밀함이 있다. 그러므로 냉철하고 논리적인 비평가들이 이 자세를 취하고자 하는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것이다.



비판



그러나 이 훌륭한 논증에도 아주 엄밀한 결합이 하나 있는데 이 자세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도 스스로 해야한다. "나의 가족을 사랑하는것도 편애인가?" 이 자세의 최고 장점은 일관적인 논리성이다. 그러나 논리성은 하나의 행동이 아닌 그것과 비슷한 모든 행동에 적용되야한다. 그러니 만약 이런 탈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것도 멈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편애의 일종이며 정합적인 논리성을 거부하는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만약 가족한테도 이것을 적용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할것인가? 그것의 결과는 확고한 사랑의 질식일것인데 이것을 완벽히 정합적으로 따른다면 우리는 자식에 대한 모든 사랑과 애정을 거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들을 보는것 처럼 아이를 대해야하며 타인들에게 배푸는것처럼 아이에게 배풀어야한다. 이것이 과연 옳은가? 우리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생각해보라 우리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사랑이 많은 사람인가? 아니면 사랑이 없는 사람인가? 우리의 최고 인간은 모두에게 공평한 무관심을 주는것인가?



아니면 모두에게 최상의 사랑과 관심을 주는것인가? 만약 전자를 골랐다면 이것이 참으로 사이코패스 살인마와 같은 선택지임을 지적하고 싶다. 세상에서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타인들을 비슷하게 대우하며 비슷하게 사랑하는 존재들은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아무런 사랑도 없다. 그들은 자식과 아내를 마치 타인들을 보듯 대한다. 만약 모든 부적절한 애정을 제거한다면 이런 사이코패스적 인간상에 다다를것이다. 아니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한번 우리의 최고 인간상을 생각해보기를 우리는 어떤 인간상을 최고로 여기는가?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완벽하게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전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어떠한 사랑도 없는사람 자신의 자식도 마치 다른 사람의 자식인것 처럼 대하는것과 남의 자식도 나의 자식인것처럼 대하는것 중에 진정 옳은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후자를 택해야한다. 만약 우리 모두가 전자처럼 대한다면 세상은 무관심 무사랑의 지옥이 될것이다. 그러나 오직 후자 처럼 살때 세상은 천국에 가까워질것이다. 한번 생각해보길 우리는 자신의 아이의 잘못을 감싸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해야하는가?"자식을 타인의 자식 보듯이 덜 사랑하세요."아니면 이렇게 해야하는가?"타인의 자식을 약간이라도 당신의 자식 처럼 생각하십시오." 이것들중 명백한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늘리라고 해야한다. 왜인가?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 나아질 가망이 있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들이 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지 아는가? 가장 절대적인 이유는 그들은 가족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들은 심각한 아동학대 강간을 당했다. 전문가들은 어린시절에 애착을 형성하지 못한다면 평생 그것을 못할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하면 가족의 맹목적인 편애는 아이를 타락시키는것이 아닌 더 나은 사람을 만들 유일한 방법인것이다. 사랑이란 넓어져가는 개념이라고 생각해보자 처음엔 어머니 다음엔 가족 전체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공동체 그리고 더 넓은 세계로 말이다. 왜냐하면 가장 사랑하기 쉬운것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그 어떤것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1+1=2도 못한다면 결코 그 아이는 미적분을 풀지 못할것임을 생각하자 그러나 우리가 주변 사람 조차도 사랑하지 못하게된다면 결국 우리는 그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며 어떤면에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와 같은 공허한 정신과 형상을 갖게될것이다. 그러니 편애야말로 진정 모든것을 사랑하게 해줄 유일한 방책인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사랑이 전혀 없는 인공지능 로브트의 세상을 가장 이상적인 세계로 여기며 가족적 사랑이 가득한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여긴다면 이 주장은 전혀 효과가 없을것이다.





2.애정어린 탈민족주의



이 자세는 우리가 말할수 있는 모든 자세중 가장 도덕적이며 건전하며 아름다움으로 가득차있다. 다름 이름으로는 인류애라는 이 사상은 모든 인간 종족을 완벽하게 공평하게 사랑하고자 하는것이다. 그러니 쉽게 말해서 우리의 애국심을 모든 나라에게 느끼게 되는것이 이 인류애의 목적이라고 할수있다. 이 사상의 제일 위대한 대변인들은 아마도 인류사에서 가장 신성하고 위대함으로 가득찬 부처,예수 같은 존재들일것이다. 모든 민족은 절대적이며 무한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존재 그거 하나로 사랑받을 자격이 생기는것이다. 사랑 받을 자격의 증거는 오직 존재함 그자체인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아가페라고 한다.



1.공정성



이 주장은 앞에서 말한것과 정반대로 공정하다. 모두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배푸니 이 사상은 완벽하게 공정하다.



2.도덕성



이 사상은 가장 도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이 인류애적 연대의식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칭송받아 마땅하다.



비판



그러나 이 사상의 문제는 너무나 치명적이며 회복 불가인데 바로 실천성이다. 모든 민족과 인간 존재들을 완벽히 사랑하기 위해서 도데체 우리는 어느 경지까지 가야할까? 그것은 바로 신의 경지이다. 오직 신만이 모두를 절대적이며 무한하게 사랑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결코 신의 사랑을 가질수 없다. 그러니 모든 이 사상의 종착점은 결국 불완전한 사랑이 될수 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우리의 자식을 사랑하는만큼 타인의 아이를 사랑할수 없는것은 타당한 진리일것이다. 그러니 이 사상을 유지하는 자는 결국 실천 불가성에 절망할수 밖에 없게 되는것이다.





결론:국제주의적 민족주의





우리는 결국 두 탈민족주의를 선택할수 없게되었다. 만약 전자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닌 로보트로 전락할것이며 후자를 택한다면 우리는 무한에 도전한는 무지한 선택을 하게 되는것이다. 우리는 인간이니 결코 전자를 선택할수 없으며 선택해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후자를 선택해야할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실천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택해야하는가? 나는 그 무엇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사상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인간들의 상승 노력 그 자체로 보아야한다. 만약 우리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로보트적 기계사회보다 더 선호하며 사랑한다면 우리는 아가페를 실천해야한다. 그러나 아가페는 결국 불가능한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나은 세계를 상상할수 있다. 아가페적 세계에 서서히 가까워지며 영원히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끝없이 가까워지는 무한한 계단의 여정을 말이다. 상상해보기를 아가페의 세상은 아름다움의 세계이며 모든 악업의 종말이다. 왜냐하면 절대적 사랑의 세계이니 말이다.



그런 세상과 아주 약간이라도 닮은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지상 최고의 업적이란 말인가? 우리는 절망해서도 안되며 절망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희망을 가지며 스스로 더 많은 사랑을 가지고자 끝없는 노력을 해야한다. 그래야만 아가페적 세상에 가까워질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수많은 방책이 있겠지만 아주 유용한 도구가 이미 우리에게 있다. 바로 민족주의 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장애물이라고 할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다. 배타적이고 편애적인 가족적인 사랑이 모든 사랑의 가능성인것 처럼 진정 민족적인 사랑이 인류애적 사랑의 시발점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가깝고 사랑하기 쉬운것을 먼저 사랑해야만 다음 단계로 갈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로 곧바로 무한으로 갈수없다. 오직 유한에서 유한으로 옮겨갈뿐이다. 부모님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사회로 말이다. 그러니 진정한 국제주의자는 오히려 진정한 민족주의자를 체험하고 진정한 민족적 열의를 가져야한다. 참된 아가페란 사랑의 평등화이며 그 사랑의 기준은 바로 가장 열정적인 사랑 바로 애국자적 열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민족을 완벽하게 사랑해야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불꽃을 외부로 욺겨야 한다. 종국엔 한 나라에서 한 지방 한 대륙 전세계로 사랑이 커져갈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생명을 타지의 키르키스탄 국민들을 위해서 바칠수 있을때까지 사랑의 불꽃을 끝없이 커지게 해야하는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해 보이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미 가장 훌륭한 국제주의 애국자를 알고 있다. 바로 안중근을 말이다. 그의 동양평화론을 읽어보라 그가 진정 동양을 사랑했음을 알게될것이며 한국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서도 의거를 했음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그의 이 작품에서 우리는 심각할정도로 처녀적 순진성을 가진 안중근을 볼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서 어떠한 배타주의가 느껴지는가? 우리는 늘 민족주의를 배타주의라고 비난하며 애국주의가 늘 배타적 편애로 가며 광기일 뿐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논리가 우리의 모든 부모님을 편애주의적 악마로 만듬을 기억해야한다. 분명히 편애적인 악마들도 있지만 수많은 증인들은 가족애의 위대함의 증인으로 남았다. 만약 안중근이 진정 국제주의적 민족주의의 절정을 보여준거라면 왜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니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한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도 줄일 필요가 없으며 유한한것을 무한화하고 끝없는 사랑의 불꽃을 증가시켜야하며 애국자적 열정을 말그대로 전세계로 확산시켜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결국 민족주의자로 남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결코 우리는 우리의 자식과 타인의 자식을 동등하게 사랑할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절망이 아닌 희망의 열광임을 결국 깨닫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