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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에서 석영중 교수는 체호프는 모호한 작가라고 언급한다.

그건 그만큼 체호프의 작풍과 주제의식이 하나에 머무르는 대신, 상이하고 다채롭다는 뜻이다.

확실히 이 작품은 여느 체호프 작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 작품은 한 노인의 죽음 전을 다룬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닌 삶이 죽음에 서서히 다가오는 그 순간을 시점으로 잡는다.

그러한 죽음 전의 삶에서, 노인은 일종의 신경증에 걸려있다.

이제껏 멀쩡하고 행복하게 영위했던, 높게 치솟아 만족감과 생활감 아래 있던 삶이

죽음 앞에서 여태껏 노인이 발견하지 못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죽음을 생각하게 되어있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는 여전히 삶에 있다.

죽음은








죽음은 이런 식이기 때문에 죽음을 상상함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후회란 건 일이 일어난 뒤에야 할 수 있는 법인데, 죽음에겐 뒤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의 풍파에 따라 모든 이들이 슬퍼만 가는데, 노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깨닫는다.

늙고 병들고 죽는데 삶은 계속되고, 늙고 병들고 죽음도 계속된다.

권태에 따라 삶은 녹슬고 모두가 맞물리지 않게 되며,

그것이 노인의 기시감과 슬픔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삶의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노인은 자신의 삶을 조금씩 되돌아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을 경멸하고, 생활을 모독하고, 화를 내고, 신경을 부리고, 모든 것에 싫증을 내게 된다.

안타깝게도 체호프가 병처럼 묘사하는 이런 고뇌에는 마땅한 치료제조차 없다.


노인은 명성 높은 엘리트 인텔리로서 세간에 명망이 높았지만,

그로 인해 돌아오는 찬사가 노인의 슬픔을 해결해주진 못한다.

어쩌면 노인 삶의 무엇도 이 슬픔을 해결해주지 못할지 모른다.




체호프가 44살에 죽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참 아이러니하다.


말년에 체호프는 결핵으로 몸이 나빠져 독일로 요양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조금씩 회복하여 글을 쓰다가 어느 순간 다시 병세가 나빠지며 44살에 숨진다.


그의 마지막 날, 의사는 마지막으로 샴페인을 주도록 하라고 말했고

샴페인을 마신 체호프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Давно я не пил шампанского."

"얼마만에 마셔보는 샴페인인지."

좋은 죽음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좋은 삶 또한 고민하게 된다.
그러면 다시 고민하게 된다. 그게 과연 뭔지. 좋은 삶은 뭐고 좋은 건 뭐고 삶이 뭔지, 뭐였는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문장을 볼 때 우리가 슬픔을 느끼듯,
이러한 고민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슬퍼지거나, 이미 슬프곤 했다.
어떤 삶은 그 슬픔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려서 슬프기도 하다.

체호프의 작품처럼 사람들은 죽고 또 살아가는데,
아직 살아있는 우리는 자꾸만 슬퍼지곤 한다.
그리고 때때론 우리도 슬픔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