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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책은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에 대해 더룬 책으로, 특히 성호학파와 근기남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장은 성호 이익과 성호학파의 학문 경향에 대하 설명이다.


2장은 성호학파 내부에서 양명학과 서학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성호학파 중에서도 신후담은 철저한 이단 배척을 주장했으며, 안정복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권철신은 양명학에 호의적이었고, 이러한 양자의 양명학에 대한 관점 차이는 서학에 대한 관점 차이로 이어졌다. (70~76쪽) 

성호학파의 자연관과 서학 인식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한역서학서를 통해 이루어졌고, 윤동규는 1756년 이후에, 안정복은 1757년 이후에 이익과 서학에 대한 서한을 주고받았다. (76~78쪽) 저자는 또한 이익이 서학과의 접촉을 통해 중국 중심의 지리관을 탈피하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83쪽) 그러나 이익을 포함한 성호학파의 세계 인식이 중국 중심 세계관을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호학파의 서학 인식을 예(禮)를 기반으로 이는 중체서용적 입장으로, 북학파나 후의 동도서기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도 명확히 하고 있다. (94쪽)

다음 장은 녹암 권철신의 학문에 관한 내용이다. 저자는 권철신의 학문이 이황-정구-허목-이익-안정복-황덕길의 계통과 권철신-정약용의 계통으로 나누어진다고 보는데, 권철신의 청년기 학문 형성에는 윤휴 역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100~101쪽) 또한 이병휴가 사망한 1776년, 즉 1770년대 후반을 녹암계 형성의 중요 시기로 본다. (180쪽)

권철신은 성호학파의 다른 학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나, 유교 경전들에서 기존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하고 있었고, 이는 동생 권일신에게도 영향을 준다.

저자는 녹암계를 성호학파에서 따로 분리하면서, 권철신, 권일신을 비롯해 정약용 형제, 이벽, 윤유일 등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신도들을 녹암계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 하에서 이승훈과 정약용의 서학 사상에 대해서도 정리하고 있다. 

제3편에서는 척사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서학은 서양 선교사들이 보유론적 관점에서 접근했더라도 조선 사회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이념이었다. 따라서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영혼불멸설이나 천당지옥설 동정설이나 천주 강생설 등은 더욱 큰 비판을 받았고, 서학서에서 비판한 성리학의 음양오행설과 이기론 등도 성리학자들에게 역으로 비판받았다. (237~238쪽)

이익조차도 서학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평가하고 있으며, (241쪽) 잘 알려진 것처럼 신후담은 『서학변』을 통해 본격적인 서학 비판을 하고 있다.(245~246쪽 표 1 참조) 안정복은 이러한 척사론을 바탕으로 더욱 철저한 척사론을 펼쳤다. 안정복은 『천학혹문』을 지은 후, 다시 『천학설문』으로 제목을 변경하였으며, 이후에 『천학문답』을 완성하였다. (252쪽) 안정복의 척사론의 내용은 신후담과 큰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신후담보다 치밀하지 못했다. (258쪽, 『천학문답』 척사론의 내용은 257~258쪽의 표 2 참조) 그리고 이러한 안정복의 척사론은 정조대 일련의 천주교 관련 사건과 더불어 공서파(攻西派) 척사론의 기반이 되었다. (259~264쪽)

저자는 1787년의 정미반회사건 이후로 공서파와 친서파가 뚜렷하게 대립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264쪽) 안정복은 이후 황덕일 항덕길 형제를 포함한 오석충 조신행 이존경 등에게 기대를 걸었고, 이들이 순암계의 다음 세대가 된다. (267~268쪽) (『복부고』 참조)

1791년의 진산사건 이후 많은 양반 천주교 사자들이 교회를 떠났고, 척사론 역시 강경해졌다. 이 와중에 저자는 처사 홍정하의 『증의요지』에 주목하여 그의 척사론을 다루고 있다. (270~274쪽)  홍정하의 척사론은 이전의 척사론들과 달리 서학에서는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서교의 멸인륜적 성향과 제사 폐지가 조선 사회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홍정하의 척사론은 척사운동에서 가장 문제가 된 제사 폐지와 무부무군(無父無君)론의 이론적 비판 체계를 정립함으로써 강준흠과 같은 공서파 인물들에게 벽이단의 논리를 제공해 주었다. (274쪽)

기호남인의 분열 역시 척사론과 연관이 있다. 숙종 대의 환국으로 정계에서 축출된 이후, 남인 문외파는 경종대에 정계 진출을 소론과 연계하여 정계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는 황덕길이 자신의 문집에서 심단 등이 허목을 중심으로 윤휴와 목, 민, 류(柳) 세 성씨와 거리를 두고 자신들을 문외파(門外派)라고 칭했다. 즉 문외파는 탁남계와 자신들을 분리하는 청남계라고 볼 수 있다. (278~279쪽)

이후의 내용은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근기남인의 분열 양상을 서술한다. (280~283쪽) 기호 남인은 또한 자신들의 학맥을 설정하기 시작했다. 황덕길의 제자인 허전은 이황의 학문이 이익과 안정복을 거쳐 황덕길에게까지 전수되었음을 분명히 했고, 다른 남인 계열 유학자들도 이익의 학문이 안정복과 황덕길을 거쳐 후학들에게 연결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이익- 이병휴-권철신-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학통은 철저히 배제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284~286) 그리고 이러한 남인 학맥에서 주목할 점은 정치적으로 공서파를 이루고 있던 여와계 (목만중계)를 별도의 학맥으로 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287~290쪽) 

이후 진산사건을 계기로 친서파와 공서파가 뚜렷하게 구분되고, (296쪽) 진산사건 이후의 척사론은 정치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진산사건 이후 채제공과 친서파들은 지속적인 정치공세에 직면하게 된다. (298~305) 대표적으로는 1795년 5월에 주문모 신부 체포 과정에서 일어난 북산사건을 들 수 있다. (305~309) 결국 이러한 남인 분열은 신유박해 이후에 근기남인의 정치적 위치가 매우 위축되는 결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