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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모시는사람들 2018
이 책은 서학이 중국과 조선에 전해지는 과정과 그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반응을 정리한 책이다. 1장은 중국에서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을 다루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천주교 선교를 위해 한역서학서와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통해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고, 서양의 학문을 중국의 문화적 상황에 적용하고, 유교와 기독교의 통합을 이끌어내고자 한 예수회의 선교 방식은 일반적으로 적응주의라고 명명되었다. (39쪽) 대표적으로는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 알레니 등이 있다. 또한 이들과 가깝게 지냈던 서광계나 이치조 등의 도움도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2장에서는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학을 접한 조선의 지배층과 지식인의 논의를 다룬다. 청나라의 중원 장악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연행을 통해 서학서를 얻었고, 특히 북경의 서점가인 유리창을 통해 서학서를 얻을 수 있었다. (72쪽) 이수광은『지봉유설』에서 리치의 『천주실의』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인조대 정두원을 통해 조선의 서학 유입이 확인된다. 이후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는 여러 서양 문물을 소개한다.
조선 조정은 발전된 서양의 역볍인 시헌력에 큰 관심을 보인다. 특히 김육은 시헌력 도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인조대 시작된 시헌력 도입 노력은 효종 대를 거쳐 숙종 31년에 감상관원 허원이 연경에서 시헌력의 토대인 『칠정역법』을 배워오고 나서야 제대로 된 운영이 가능했다. (89~90쪽) 또한 중국과 조선의 일부 학자들은 문화적 자긍심을 유지하면서도 서양의 뛰어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한 절충적 사상으로 ‘서학중원설’을 주장하였다. 이는 서양의 뛰어난 과학기술의 연원이 본래는 중국 전통의 천문수학서 『주비산경』이 중국에서 서양으로 전해진 후, 그곳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중국에 다시 들어왔다는 것이다. (91쪽) 유명한 학자로는 중국에는 매문정이 있고, 조선의 학자로는 서명웅, 이헌경, 홍양호, 서유본 등이 대표적이다. (92쪽)
다음 징에서는 성호의 서학 인식을 다룬다. 여러 연구에서 다루고 있듯 이익은 서교의 교리를 이단이라고 배척하면서도 서학의 긍정적인 부분은 받아들이고자 했다. 성호는 이황의 학문을 잇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도 (98~99 참조) 폭넓은 공부를 위해 여러 학설을 받아들였고, 서학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는 판토하의 『칠극』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마테오 리치를 성인(聖人)이라 평가하는 등( 돈와서학변 지문편) 성리학에만 경도되지 않는 학문 경향을 보였고, 이는 성호학파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준다.
다음 장은 성호학파 지식인들의 서학 인식과 비판에 관한 것으로, 신후담과 안정복에 대해 다룬다. 신후담은 1724년에 성호를 찾아가 서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서학서를 찾아 연구한 끝에 조선 최초의 반서학적 저술로 평가받는 『서학변』을 저술하였다. 신후담은 성호와 나눈 서학에 관련한 토론과 이천 지역의 이식, 상주 지역의 이만부와 나눈 서학 관련 내용을 정리한 『기문편』을 편찬하였다. (130쪽)
신후담은 이를 통해 당시 잘 알려진 『천주실의』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영혼론을 설명한 『영언여작』, 서양의 지리론을 설명한 『직방외기』의 내용을 비판한다. (132~142쪽)
신후담의 서학 비판은 서학 자체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었다. 이에 반해 안정복의 서학 비판은 신후담과는 차이가 있었다. 안정복은 『천학문답』을 저술하며 서학을 비판하고자 했다. 안정복의 서학 비판은 당시 근기남인 내부에 서학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천주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이승훈과 정약용 외에 이가환 또한 서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안정복은 이러한 성호학파 내부의 분위기가 근기남인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천학문답』을 저술하여 서학 ·천주학으로 경도된 남인 학자들을 회유시키고자 했다 (144~146쪽) 안정복은 권철신에게 천주교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다. ( 『순암선생문집』, 여권기명서)
다음 장은 이벽과 정약용의 서학 탐구에 관한 것이다. 정약용은 스스로 천주교를 버렸다고 정조대에 상소를 올렸으나, (『여유당전서』 변방사동부승지소) 정약용 철학에서 서학의 영향이 발견된다. 이벽 역시 유학자였지만 천주교를 믿다가 전염병으로 병사하였다.
8장에서는 척사론에 대해 다루는데, 주목할 부분은 후대 성호학파의 영향을 받은 무명자 윤기와 목재 이삼환의 서학비판이다. 윤기는 『벽이단설』을 저술하여 척사론을 펼쳤다. 『벽이단설』의 저술 시기는 을사추조적발사건 이후이기 때문에, 윤기는 이익보다 더한 척사의 입장을 보여준다. 따라서 윤기는 서학-천주학에 대해 사설(邪說)이라는 표지를 붙이고 있다. (232쪽) 『벽이단설』은 윤기와 객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형식이다. 이를 통해 서학에 대한 국가적 금령이 내려지기 이전 조선 학계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234쪽) 『벽이단설』에 따르면 당시 서학은 이미 유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학에서 말하는 상제가 인격적 존재로 추앙받는 것을 비판한다. (234~235쪽)
또한 천당지옥설 등에 대해서도 비판하지만 마테오 리치의 천문과 역법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저자는 이에 대해 “말년의 제자라도 성호학파의 학풍을 따라 서학의 자연학과 기술의 측면을 이해했고, 이에대해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평가한다. (235~236쪽) 그리고 이를 유학에 도움이 될 기술적 측면에서의 서학과 인격신을 추앙한다는 종교적 측면 사이에서 갈등과 선택을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236쪽)
다음으로는 목재 이삼환의 『양학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삼환은 충청도 예산에 거주하던 성호학파의 학자였는데, 충청도 지방에 천주교 신앙이 확산되는 것을 목격하고, 1786년 『양학변』을 저술한다. 당시 충청도는 날로 천주교가 확산되고 있었다. (237~238) 이삼환은 『양학변』에서 당시의 신앙 활동의 실태를 묘사하고, 이를 비판한다. (238~240) 이삼환은 서학이 천학(天學)이라고 불리는 점을 문제삼고, 양학이라고 칭하며, 그들의 말은 불교를 베낀 이적의 말이라 비판한다. (238~239쪽) 『양학변』의 특징은 서학에 빠지는 사람의 동기를 셋으로 나눈 것이다. 첫 번째는 양학의 수학적 계산과 천문학적 지식에 빠져 그 이론이 진실되다고 믿은 이들, 둘째는 선비들 가운데 명예를 사모해 천주교인들과 어울리는 경우로, 이들은 이치의 유무 도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마음으로 기뻐하며 양학으로 넘어가 미혹되었다.
셋째는 가장 천박한 자들로 견식이 없으며, 화복에 이끌려 지옥의 고난이 무서워 천당에 오르고자 진심으로 이를 추구하는 이들이다. (240쪽) 또한 영남 남인 류건휴의 『이학집변』을 소개하고 있다. (241~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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