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0490f719b7826af43ee984ed29837468d0c1ae654c5fa83c032a869379d9945c3399ea


필자는 재야의 고대인 "제임스초이스"이다.


고차원적인 예술은 고차원적인 도덕적 감각 속에 창조된다는 것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인 보편적 법칙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감각이란 고전적 정신이 갖는 보편성의 하나의 필수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전 작품들 속에서 고도로 발달된 도덕적 판단들을 보며, 고전 작품들 속의 인물들이 미개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우아한 존재로 나타나는 까닭은 그들을 판단하는 도덕적 감각이 극히 정교하기 때문이다.


헤르만 브로흐는 「몽유병자들」에서 '유미주의자들도 선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로 도덕적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니체적인 '가치의 창조자'는 도덕 감각이 없는 무정부주의적 혼돈이 아니라, 도식화된 가치를 부수는 새로운 선과 영속성의 창조자로 나타난다.


보들레르적 퇴폐주의도 그가 '최후의 기독교적 예술가들'이라는 독특한 맥락을 벗어나게 되면 순식간에 깊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후 세대 데카당들의 사유의 폭은 대체로 훨씬 협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보들레르와 현대의 데카당 사이에는 심연이 있다)


고전 작품들 속에서는 선한 것과 악한 것 모두가 어떤 영원한 보편성의 차원에 도달해 있고, 그것은 직접적인 메시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행위의 철학을 통해 간접적으로, 존재의 모습을 통해 표현된다.


이것은 단순한 메시지의 전달과는 다르다.


그것은 존재 속의 선악의 폭발을 표현하며, 충분한 도덕적 깊이를 가질수록 그 폭발은 더 깊이 느껴질 것이다.


선악의 혼재는 현대 문학의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고전적 예술의 기본적 세계 인식이다. 고전적 예술에서 선악의 복합성은 견고하게 나타난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등의 풍부한 입체성은 일반적인 현대 인물들을 능가한다.


결론적으로, 고전적 작품들 속에서 선악은 단순한 메시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폭발적으로 분출되고, '표현된다'.


왜 고전적 작품은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을 폭발시키는가? - 여기에는 어떤 고전 작가들도 자기의 메시지를 전해받을 '이후 세대'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 역시 작용한다.


능동적으로 영원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어떻게 헤아릴 수 없는 이후의 독자들을 이성적으로 예측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정확히 전하고자 시도할 수 있겠는가? - 그들은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향해 자기의 작품을 던질 뿐이다. 만델쉬탐의 비유 속, 바다로 던져진 유리병 안의 편지처럼. 이것이 문화적 감각의 유일한 보존 형식이다. 스탕달은 "나는 100년 후에나 이해될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사유의 이러한 폭발성과 감각성, 헤아릴 수 없이 복합적이며 직관적인 성질은 고전적 문학이 갖는 영원성과 보편성의 비밀이다.


선악의 단순한 불분명함은 선악의 드라마틱한 대조과 혼재의 표현을 불가능하게 하기에, 오히려 인물들의 입체성을 떨어뜨릴 것이다. - 도덕적 개성의 성립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고전적 작품들은 도덕을 단순한 사회적이며 외부적인 규칙, 규범이 아니라, 선악과 그 속에서의 존재의 문제로 인식하도록 자극하기에 귀중하다.


선악에 대한 의식은 시인의 '자기 정당성의 의식'을 위해 필수적이며, 만델쉬탐에 따르면 시인은 그런 자기 정당성의 의식 없이는 창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