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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서슴치 않게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말한다.

대중성이 높은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복거일이 유명한 작가인것도 아니기에 나의 짧은 답변 이후에는 적적한 침묵이나 그책이 무슨 내용이냐는 질문이 돌아오곤 했다. 나는 짧고 굵게 요약하는 재주가 부족한 사람이기에 궁색하게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영화 아세요? 그 영화의 배경인 소설이랍니다. 라는 답변으로 줄거리를 요약하곤 했다. 실제로는 그것이 괴작 로스트 메모리즈 따위로 수식될 내용이 아니라는걸 알면서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나는 문학보다 비문학을 더 즐기는 사람이고, 복거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며, 대체역사라는 장르를 아주 사랑하는것도 아니기 떄문이다.

학교도서관이나 동네 책방 아주 깊은곳에 쿨쿨 자고 있는, 가끔식 대체역사의 역사를 설명할떄나 나오는 이 오래되고 이상한 책을 난 왜 좋아하게 된것일까.

처녀작인 이 책이 유일한 히트작인 작가조차 자신이 이 책으로 기억되기 싫어한다는 말을 하는데, 작가에게 조차 부정하고 싶은 첫경험같은 이 책을 왜 난 사랑하게 된것일까.


어려서 역사라는것을 알게된 이후부터, 나는 두가지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첫번째는 내가 학교,집,책,사람,인터넷에서 배운 역사라는것을 보아했을떄, 지배자의 혹정에 악함에 비해 피지배자들의 항거는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이다.

왜정 치하의 우리민족이 그랬고, 나치스 치하의 유대인과 프랑스가 그러했고, 남부 백인 치하의 흑인노예들이 그러했고, 현재 북한,중공 치하의 인민들이 그러하다.

물론 항거가 분출되는 떄가 잔즈반란,레지스탕스,3.1운동같이 간혹가다 있지만, 결국 폭정에 비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미약한것이였다.

교과서나 누군가의 거친입에서 들려오는 우리가 당했던 억압의 역사를 들을떄마다 나는 왜 우리민족은 강하게 들고 일어나지 못했는가를 생각하며 괴로움에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팠다.

두번쨰 의문은,우리가 압제당한 역사에 대해서 일본은 심드렁해하며 "누구나 그랬다" "그렇게 잔인하지 않았다" "잊었다. 옛날 이야기다"라고 일관적인 태도를 보이는것이였다. 압제에 대한 역사를 주제로 우리가 어떤 소설,시,드라마,영화,연극,노래,게임을 만들고 그것이 흥행하더라도 일본인들은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부정할뿐이였다. 한번을 제외하고 지배당한적이 없어본 일본인들은 정말로 억압의 부당함과 억울함을 모르는것일까? 그들은 정말로 같은 인간이 아닌것일까?

이 책과 이 책에 대한 일본인들의 호평은 나의 이 두가지 의문점에 대해서 훌륭한 답을 주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인 이 책에 배경인 일제 치하 조선은, 극한의 모순과 억압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책을 점점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극한의 모순과 억압에 집중하는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이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에 집중했다.

조선으로 일본 내지의 모든 쓰레기와 유해산업들이 들어온다는 건조한 팩트와 거시적인 관점은 보이지 않고, 주인공이 조선인이기에 경찰에게 좀더 검문받는다던지, 술자리에서 역사나 시류를 말할떄 조금더 조심하게 된다던지 같은 아주 사소한 문제점들만이 보였던것이다.

그리고 사소한 문제점들에 집중하게 되면서, 나는 점점 항거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검문좀 받는다고 굳이 안락한 삶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은밀히 할 이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지배적이게 됐다.

주인공은 점점 거시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면서 작가가 만들어놓은 억압의 세계에서 벗어나는데, 작가의 글을 읽는 독자인 나는 점점 그 억압의 세계를 미시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그 억압에 순종하게 된것이다.

조선은 거시적으로는 일본에게 모든것을 쥐어짜이고 모든 더러운 점들을 짐처럼 부여받지만, 조선인이 겪는 미시적인 세계에서의 억압은 사소한것에 그친다.

그리고 미시적인 시각에 점차 집중하게 되면, 마치 일반인들이 그러하듯이, 느끼는 억압들은 항거에 따라오는 처벌에 비해 너무나 가볍고 사소한것들이 되버려 항거를 할 동기를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나의 평범했던 대다수의 조상들이 일제에 압제에 들고 일어나지 못했던 이유였다는것을 깨닳고, 나는 첫번쨰 의문을 해소하게 되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일본인들에게도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 물론 일본이 승승장구한다는 단순한 설정에 기분이 좋아 호평한 사람들도 존재했지만, 대다수는 어떻게 이걸 한국인이 생각했냐, 놀랍다는 반응이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한국인이 상상한것이 놀랍다는것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비명을 찾아서와 다른 일제강점기나 여타 억압을 다룬 한국문학의 차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까 언급한 사소함이였다. 그 무서움 말이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를 다룬 책들을 보게 된다면, 주인공이나 조연이 겪는 시련과 책의 주안점은 일제가 행한 잔인한 고문,위안부,강제징집,학살,강간,생체실험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왜 우리민족이 35년간 지배당하면서 점차 반항하기를 줄이고 순응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에 부족한것이다.

만약 가혹한 처벌과 고문,반인륜적인 일본의 전쟁범죄가 우리민족을 순응하게 만든것이라면, 일제가 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방향을 선회했겠는가?

진정 무서운것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소한것들이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고, 점차 거시적인 시각을 버리고 미시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이것이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우리민족이 압제에 순응하게 만든것이였다. 우리 민족을 35년간 지배한것은 진정 순경의 곤봉이 아니라 일상의 무기력함이였던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책을 제외한 대다수 한국문학에서는 이 사소함의 무서움에 집중하기보다는 거대한 공포에 집중했다.

반면 지배했던 민족만이 알수 있는, 그 비밀을 이 책의 작가는 알았고, 일본인들은 그것에 경악한것이다.

쥐는 고양이의 무서움을 제대로 모른다. 그저 이야기를 통해 짐작만 할뿐이다.

오직 고양이만이 고양이의 진정한 무서움을 안다.

피지배 민족은 지배민족이 얼마나 잔인하고 공포스러울수 있을지를 모른다. 오직 지배했던 자만이 지배의 공포에 끝을 알수 있다.

그러나 이책은 피지배민족의 시각을 탈피하고 지배민족을 직시하고 지배의 본질과 공포의 끝을 완벽히 관통했다. 그것도 해방된지 40년도 안지난 80년대에 말이다.

피지배민족이 지배민족을 이해하고 직시한, 이 책을 나는 이러한 이유들로 가장 좋아한다. 마치 우리가 화단에서 핀 장미보다 아스팔트에서 핀 민들레에 더 감탄하는것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