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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글은 박찬국 교수님의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의 감상문입니다.
니체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철학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니체의 사상을 간략하게나마,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저의 경우에는 니체의 사상이 궁금했다기보다 철학 도서를 읽어보려던 차에 추천을 받게 되었고 바로 구매해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단순히 내용 정리와 느낀 점을 기록한 감상문을 적어도 됐을 것입니다. 허나 철학이란 그것 자체만 두고 보면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을 비추는 도구로 활용해야 그것이 품고 있었던 가치가 더욱 빛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본 도서를 읽으며 이해한 니체의 사상에 비추어 2022년에 유행했던 말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럼 어떤 말을 가져와볼까요.
1. 알빠노?
나무위키에 따르면 본 용어의 의미는 '알 바(알아야 할 것)'+'노'의 합성어로 대략 '알 바 아니다', '(내가) 알 바인가'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즉, '나'가 세계의 사건에 무관심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이런 자세를 어떻게 여겼을까요. 니체가 이상적으로 보는 세계에서 각 주체는 자신이 처한 세계와 용기있게 대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이 '대결'이 무조건적으로 폭력적인 싸움이라 할 순 없습니다. '대결'은 그 과정(세계와 대결하여 고뇌를 거듭)을 통해 문학이나 춤 같은 예술로 구현될 수도 있으니까요. 또한 관계에 있어서는 힘의 구분에 따라 강자는 약자를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도 합니다. 어찌 됐든 서로의 힘이 동등하든, 차이가 확연하게 나든 간에 우리는 일단 세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니체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대결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고양시키고 상대방이 더 뛰어날 경우 이를 인정하고 배워나가야 합니다. 즉, 니체에게 세계는 무궁무진한 '알 바(알아야 할 것)'입니다.
타인과 세계에 무관심하여 "알빠노?"를 연발하게 되면 니체의 입장에서는 현실에 안주하는 비겁한 자,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말세인'이 되고 맙니다. 니체의 유명한 비유에 따르면 '낙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겠죠. 기존의 환경, 사회 규범에 따라 성장 따윈 생각할 수 없는 톱니바퀴로서의 삶. 니체는 위대한 모든 지성인들은 모두 '회의가(懷疑家)'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알빠노?"와 나란히 쓰일 수 없습니다. 니체가 말한 회의가는 아무런 진리도 의미도 없다고 절망하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다양한 눈으로 세계를 볼 줄 아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자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즉, 비록 세계를 완전히 파악할 순 없더라도 좌절하고 세계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어떤 단일한 확신에서 벗어나 오백 가지의 확신을 바라보고 그 가치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니체가 언급한 '회의(懷疑)'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니체는 우리를 '대지에 뿌리박은 나무'로 봅니다. 즉, 머리는 이상을 추구하더라도 발은 땅을 딛고 있죠.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빠노?"라는 말은 니체에게 있어 터무니 없는 말에 해당하겠죠?
2. 누칼협
이 역시 나무위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자기 의지로 선택한 일이나 직업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거나 개선을 요구하는 데 대해, 그걸 하라고 협박한 사람도 없으니 그럼 하지마라고 조롱하는 유행어'입니다. 풀이를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의지로 선택한 일'에 '문제를 제기',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쩌면 자신이 속한 세계와 끊임없이 대결하고 있는 자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사건을 자기 의지로 선택했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자에게 누군가 '누가 협박한 것도 아닌데..그럼 하지마'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응답은 앞선 "알빠노?"가 전제된 상태에서 개인의 투쟁을 무의미화시키려는 시도입니다. 개인의 대결 의욕을 저해시키는 독 같은 말입니다.
문제를 제기한 인물은 크게 세 가지 경로를 원할 것입니다. 하나, 안락하나 따분한 삶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 둘, 고통스러운 상황을 해결하여 자신의 현상태를 개선시키고 싶다. 셋,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그냥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 앞의 두 가지 경우에는 세계에 대결하여 자신의 힘을 고양시키는 것이라 볼 수 있으나, 마지막의 경우에는 일종의 도피로 볼 수 있습니다. 니체는 세 번째 목적을 가리켜 알아서 비판할 것이니 우리는 앞의 둘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령 그러한 대결의 문제를 제기한 자가 유혹에 넘어가 자신의 바람을 접고 원래대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안락하고 따분한 삶으로 침전될 것이 분명합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갇히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발전은 없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 내에서의 발전이 있을지는 몰라도 분명 한계는 존재합니다. 자신을 향한 근본적인 발전이 아닙니다. 니체의 입장에서 이는 건강한 삶이 아닙니다. 이렇게 건강하지 못한 삶이,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 사상'에 의해 끊임없이 매분 매초 똑같이 영원하게 반복된다면 어떨까요. 고통스러운 자들은 영원히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안락한 삶에 안주하는 이들은, 당장의 편안함에 행복해할지 모르겠으나, 니체는 이를 가련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스스로 고귀해지는 것을 포기한 인물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대한민국을 바라봤을 때는 니체의 이런 입장이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신적 고양보다는 물질적 풍부함, 미래의 안전성을 대부분 우선 순위에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게 틀렸다, 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전부다, 라고 했을 때 다소 씁쓸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누군가 칼로 협박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우선 순위를 고려해 뒤로 물러납니다. 허나, 니체의 입장에서는 누가 칼로 협박해도 똑같이 칼을 들고 대결하는 인물을 흐뭇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3. 중꺾마
올해 스포츠 경기를 자주 본 사람들이라면 심심찮게 마주쳤을 용어입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리그 오브 레전드 2022 월드 챔피언십을 보도한 기사의 제목에서 유래된 유행어입니다. 본 도서의 첫 머리에, 박찬국 교수는 장영희 씨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 번'에 실린 노인과 바다와 관련된 에세이를 주목합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인 노인이야말로 세계와 대결한 '초인'이라고. 청새치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대결하여 승리도 패배도 없는 고귀한 대결을 하였다고. 그래서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고.
우리의 삶도 노인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험 요소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우리들의 적은 존재하며 (니체에 따르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계에서 대결하며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몸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살아있다면 의식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살아갈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몸은 멀쩡하나 마음이 무너졌다면 어떻게 될까요.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겠죠. 물론 무너진 몸이 언젠가 마음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건한 마음은 최소한 그 파괴에 다다르는 시간을 지연시켜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무너졌다는 것은 엔진이 고장났다는 뜻입니다. 시작할 수 없습니다. 발전 가능성이 뿌리부터 완전히 제거된 것입니다. 이는 분명 전자보다 위험한 상황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종교로 눈을 돌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니체의 입장에서 종교란, 연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입니다. 물론 힘을 강화시켜주고 고양시켜주는 종교(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와 지상의 힘이나 쾌락을 죄악시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강조하는 종교(그리스도교)로 나누긴 합니다. 결국에는 모두 허구이긴 하지만 니체는 전자를 긍정하고 후자는 비판합니다. 어쨌든 마음이 힘든 자들은 대부분 결국 종교에 의지합니다. 그리곤 구원의 신념을 가져 마음의 위안을 얻고 편안해집니다. 니체가 이런 편안함을 긍정할까요? 니체가 긍정한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는 각 개인이 자신의 힘을 뽐내 대결하여 스스로를 강화하고 고양시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가령 고대 올림픽의 경우에는 신에게 올리는 일종의 제사였습니다. 안락한 정신상태를 위한 종교는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자기 강화를 등한시하여 우리의 성장을 저해시킬 뿐입니다. 약속된 구원의 신념 또한 수동적인 헛된 믿음일 뿐입니다.
니체에게 변명은 필요없습니다. 어떤 곤경이 와도 춤추듯이 기뻐하며 받아들인 후 그것을 자기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즉,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몸은 꺾여도 좋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그래선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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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제가 느낀 것은, 니체의 사상이 자칫하면 유일한 것으로 현혹되기 참 쉬울 것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태도의 변화를 급진적으로 유도한다. 둘째, 힘을 강조하여 오독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셋째, 문학적 표현의 최면적 효과가 상당하다. 그래서 그런건지 유독 니체는 중2병과 엮여서 언급되기도 합니다. 중2병도 결국 나와 세계의 (경우에 따라서는 이능력) 대결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완벽한 철학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완전한 철학이 어떻게 힘든 삶을 위로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일까요?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세계의 모든 부분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일어난 역경과 고난은 더욱 단단해보입니다. 빈틈이 보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그 앞에서 웃으며 춤추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처음 그를 본 독자들은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무릎 꿇고 슬퍼하며 땅을 쳐야 할텐데 그는 왜 그러지 않는가? 세계를 '알 바'로 여기고 '누가 칼로 협박하지 않았고' '마음이 꺾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겐 그 벽마저 호기심 덩어리입니다, 자신을 강화시켜줄 기회입니다. 그 과정에서 파괴될 수는 있으나 숭고합니다. 저기서 춤추고 있는 단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이 우리를 위로해줍니다. 그는 기쁘며, 그 기쁨은 곧 진심입니다. 물론 이것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지속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에 하나의 가능성을 추가로 제시해줍니다. '지금보다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것은 크나큰 잠재력을 가진,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가능성입니다. 그 가능성이 우리를 위로해주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책 자체에 관해 평하자면, 니체의 사상을 설명할 때 예시를 많이 들어준다는 점, 중간중간 일러스트와 넉넉한 페이지당 글자수로 여유있는 독서가 가능하다는 점, 다른 사상가(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사르트르 등등)와 비교를 해준다는 점, 니체 원 저서를 알차게 인용해준다는 점, 다양한 주제(예술, 죽음, 종교 등등)와 연관시켜준다는 점 등등이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난이도도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함부로 평하긴 위험하나 이 정도로 쉽게 풀어 먹여주는 책이 있을까 싶기도 하네요. 니체가 처음이신 분, 애초에 철학이 처음인데 관심이 있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결론> "알빠노?", "누칼협?"보다 "중꺾마"를 애용하자.
자신이 읽은 책을 사회 현상과 결부시키는 이런 리뷰는 대단하네. 비판까지 더해졌으면 100점 줄텐데 99점 주겠다.
정동호 교수의 '니체'를 읽으면서 비판점도 곰곰이 생각해볼 예정입니다…중꺾마의 자세로 비판적 사고 역량을 늘려보겠숩니다 - dc App
나 t1팬인데
앗 - dc App
ㅋㅋㅋㅋ - dc App
하앍 집 가서 게걸스럽게 읽어쥬마 일단 추천 - dc App
자매표... 연애가 힘드냐고 사드가 물었따도 읽어보세요
그건 다른 의미에서 고통 앞에서 기뻐하라는 책일 것 같네요 - dc App
최근에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아카넷 역 찍먹해 보는 중인데 너무 중2병 같다는거 동감. 쓸만한 글귀가 있긴 한데.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이 인용되지? 내가 서구 사상이나 문학 지식이 없어서 이 사람의 비유를 이해 못하나?+이 텍스트에서 알맹이만 빼내서 인용된게 지금 알려진 니체인가 싶다. 그리고 읽을수록 너무 극단적으로 인용될 것 같은 문장 뿐이더라. 내가 니체의 사상을 알고 싶다는 목적 보다는 니체를 응용한 사상가들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니체를 읽어서 색안경을 낀 채로 읽어서 그런가. 본문에서 말했던 태도 변화를 급진적으로 강조 힘 강조 오독, 문학적 최면 효과도 거부감 느껴지고.
그리고 이 사람 말 약간만 비틀면 나치즘류의 그런 안 좋은 류의 무언가가 될 것 같아. 사회주의처럼 약간의 수정만 가하고. 수정주의적 타협+급진주의 해석론 더해주면 공산주의 혁명 이상의 파급력을 보여줄 것 같은 사상이야. 대단한건 인정함. ㄹㅇ
여튼 리뷰 잘 썼다.
그래서 그런지 정동호 교수의 '니체'의 첫문장에서 니체처럼 많이 읽히고 널리 오독되고 있는 철학자도 없을 것이라 하더라구요. 개인적으로 니체의 확신에 찬 문학적 수사들이 이를 인용하는 후세인들에게 어떤 설득력을 제공한다는 느낌이 있음, 그 문장들 자체만으로. 그래서 인용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일지도? - dc App
안그래도 언젠가 그런 나치즘 같은 급직적인 사상이랑 엮은 2차 저작 찾아보려구요…아무튼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dc App
니체 사상을 실제로 나치가 선전하고 이용했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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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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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부족합니다 부끄 - dc App
알빠노?
어허, "중꺾마" - dc App
예술이네
니체가 한 말 중 하나인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도 글쓴이 분이 얘기하는 ‘중꺾마’ 랑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듯. 좋은 리뷰 고마워요~
참 멋진 구절이죠…감사합니다 ^-^ - dc App
중꺾마? 알빠노 누칼협?
알중누빠꺾칼노마협
나 t1 팬인데 글쓴이 어디살어? 그냥 궁금해서 ^^
ㅋㅋ개웃기네 읽어봄
정동호 책 리뷰도 기대함~
난 니체야말로 누칼협 알빠노의 원조인 거 같다고 느꼈는데. 누가(말세인들이) 칼 들고 협박하건 말건간에 알빠노? 라고 허허 웃어넘기고 자기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연상됨
2022년을 되돌아보니 조커가 니체말을 인용하여 바꿔 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그건 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