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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프랭클의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를 봤는데 자유의지 부분도 좋지만 이전에 삶의 의미를 찾아서 감상에서 언급했던 적이 있기에.. 링크로 갈음함.

사실 이전 책과 비교해봤을때 비슷한 내용이긴 하지만(그럼에도 읽어볼만함) 대신 이 책에선 특이하게도 현대문학을 언급한 부분이 있음. 실존적 공허를 치료하는 빅터 프랭클의 작가들의 의무에 대한 간절한 목소리가 담겨있고, 독붕이들이 좋아하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언급이 되있어서 내가 예전에 적은 감상문을 좀 편집하여 빅터프랭클의 관점대로 나름대로 적어봄.



로고테라피의 의의


로고테라피는 '과거에 대한 낙관론'이자 '미래에 대한 행동주의'다.


현재와 미래에 표류하는 수많은 가능성을 포착하여 의미를 부여해 과거로 옮기는 것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로고테라피의 실행방법이다.


삶의 의미는 특정한 상황 속에서 개별적으로 발견되기에 스스로 붙잡아야만 한다. 헬라어에 따르면 의미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 의미있는 시간을 카이로스라 하는데 크로노스 속에서 카이로스를 발견하고자 하는 일시적인 노력이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가져다준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창조한다. 때론 인간은 과거의 무상함과 죽음이란 미래가 도달할 인간의 운명의 무상함을 토로하지만, 과거에 저장된 의미들의 가치는 퇴색하지않고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으며,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과거로 저장된, 저장할 창조행위를 마무리지으며 하나의 창조, 완전한 삶이 된다.




로고테라피와 현대문학의 관계


현대문학계에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실존적 절망에 관한 주제를 즐긴다.


인간의 실존을 위해서는, 실존을 위한 의미 추구를 위해서는, 자기내적상태를 단순하게 자기표현으로 일방적으로 읊조리는 것에 그치지말고 자신을 초월한 확실한 어떤 대상을 향해야 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로 작가가 단순히 개인의 의미상실과 부조리를 써내려가거나 문학을 통해 그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초월한 어떤 대상을 향해 작품을 써야한다. 실존적 절망을 다룰 것이라면 독자들을 단순 부조리, 상실감의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폭로로 독자들과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다는 연대감을 주고 느낌을 나눔으로써 실존적 공허라는 역병에 대한 치료법으로 기여를 해야한다.


이반 일리치가 실존적 공허와 맞부딪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마음껏 표현할 자유를 누리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자유와 책임이 균형을 잃으면 독단으로 빠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한다. (빅터 프랭클은 책임의 여신상도 만들자고할 정도로 자유에 따른 책임을 중시한다.)




로고테라피로 본 이반 일리치의 죽음


빅터 프랭클은 하나의 원칙에서 모든 것을 파생하고 있는데 하나의 원칙이란 바로 의미의 추구다. 의미의 추구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 내적에 갇힌 폐쇄성을 뛰어넘어 자신을 초월하는 개방성을 갖춰야 한다. 또한, 단순한 자기표현을 넘어 자기가 아닌 어떤 무엇인가(관념, 타인 등)를 향해 메세지를 전하는 것으로 의미를 추구한다. 이 모든 의미의 추구 과정의 총체가 로고스이고 로고테라피의 지향점이다.


이 관점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살펴보자.


이반 일리치는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죽음의 진실을 마주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내려진 유일하면서도 확고한 진실이다.


거짓 속에서 유일한 진실을 깨닫고 세계의 온갖 거짓과 인간의 위선을 간파한 이상 그 거짓에 더 이상 속아 놀아나는 것은 비겁하다. 본질적으로는 자신을,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진실된 관계를 보며 삶의 진실을 응시한다. 마침내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모든 꿈과 희망을 버리고, 삶의 진실을 향해 모든 거짓된 것들에 대항한다. 이 거짓을 떨쳐내고 짓밟고 이겨냄으로써 그는 비로소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 드디어 죽음이란 운명을 받아들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죽음을 맞아들이는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스스로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갖추는 것만이 운명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실존적 공허에 시달렸으면서도 그 실존적 공허를 마주하여 무찌르기 위해 분투하고 마침내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이런 실존적 공허의 문제는 톨스토이가 살던 그 시대에만 통용되던 것이 아니라 현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겪는 문제이기 때문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란 소설이 불멸의 고전이 된 것이다. 이렇듯 훌륭한 고전의 통찰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이 모든 과정이 스스로의 힘에 의한다는 점에서, 모든 의미는 누군가가 만들어주거나 지정해주는게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여야 한다는 빅터 프랭클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톨스토이는 본인이 죽음이란 문제에 천착해 괴로워하다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어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을 창조해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환기시켰고, 그로 인해 독자들은 삶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린다. 그것이 실존적 공허를 겪는 우리에게 위대한 작가가 건낸 위로이자 치료책이며, 빅터 프랭클이 언급한 작가들의 의무일 것이다. 이렇듯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의미를 추구하며,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같은 작품을 집필한 한 인간의 의미를 향한 의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겐 실존적 공허를 퇴치할 실마리를 제공하는 구원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