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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정조 15년(1791) ‘장서사건’과 채제공」, 서강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2
해당 논문은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진산사건을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켰던 홍낙안의 편지 유출 과정과 이후의 진산사건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 9월 29일, 당시 가주서였던 홍낙안은 좌의정 채제공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어 10월 1일 통문을 통해 진산사건의 내막을 유생들에게 알린다. 결국 이 사건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한영우에 의해 홍낙안의 편지가 공개되었고, ,(9~10쪽) 저자는 여기서 홍낙안이 장서(長書)를 유생들에게 돌렸다고 주장한다. (10쪽) 홍낙안의 편지 공개로 채제공은 사상적인 문제와 관료로서의 도덕성 문제, 당인으로서의 편파성 문제 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11~12쪽)
채제공은 진산사건 당시 독상(獨相)이었기에, 여러 견제를 받았다. 체제공은 정조 12년에 입상(入相)한 이후, 오광운의 정치 의리를 이었고, 사도세자 보호 세력으로, 정조의 큰 신임을 받았다. 저자는 진산사건 이전까지의 채제공의 정치적 상황을 다룬다. (14~22쪽)
다음으로 저자는 홍낙안에 대한 설명과 그의 정치적 배후에 대해 논한다. 홍낙안은 남인으로 1787년 반회사건에서 척사의 여론 조성에 힘썼고, 이듬해 정월 인일제(人日製)에서 친책문(親策文)을 올려 3위로 급제하였다. (23쪽) ( 『벽위편』 참조) 이 책문은 척사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홍낙안의 척사에 관한 열정과 당시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기호남인 애부에서 서학에 대해 공서파와 친서파로 나누어진 상황 등이 홍낙안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판단한다. (24~26쪽) 이후에는 진산사건 당시 홍낙안에 대한 정조의 추궁에 관한 설명이 이어진다. (26~27쪽)
다음 장은 이에 대한 채제공의 대응이다. 홍낙안의 편지를 본 후 채제공은 반회사건의 당사자 중 한 명이었던 이기경에게 이에 대해 묻는다. 이기경은 정치공세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것을 채제공에게 요구한다. 이후 이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되자, 채제공은 차자를 올려 척사의 입장을 밝힌다. (28~31쪽) (차자의 내용 정리 32쪽) 이후 정조와 서학의 폐단과 해결 방안에 대한 논의를 한다. (33~35쪽)
저자는 채제공이 홍낙안의 편지를 받기 이전까지 진산사건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35~36쪽) 결과적으로 채제공은 교주(敎主) 문제에 대해서도 신중한 입장을 보이며, 천주교 문제에 있어서도 온건했다. (36~37쪽) 이후에는 진산사건의 결과와 정조의 처리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37~42쪽)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홍낙안의 주장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고자 한다. 채제공은 지속적으로 서교에 대한 척사를 주장했고, 안정복에게 척사의 입장을 높이 평가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44쪽)( 『번암선생문집, 권35, 「불쇠헌기」) 채제공은 또한 실천과 행동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영· 정조 대의 여러 기록이나 신임을 볼 때 그가 일부러 진산사건을 숨겼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44~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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